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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시세상

한평짜리 인생, 택시기사

희망연속 2008. 5. 6. 15:35

남부러울 게 없었다. 탄탄대로였다.
은행원의 인기가 한창 좋았던 1963년 서울은행에 입사해 고려투자금융 이사, 동아증권 상무를 거쳐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직을 세 번이나 연임했다. 

 

그런데 돌연 대표이사 임기를 1년 남긴 채 조기 퇴직했다.
20년 전부터 계획했던 택시운전으로 '인생의 2막'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바로 택시기사 김기선(64) 씨의 드라마 같은 은퇴 후의 삶 이야기다.

 

"왜 조기 퇴임했냐구요? 환갑기념으로 개인택시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택시운전이야 언제 시작하든 무슨 상관이랴 하겠지만,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새해 첫날 한 해의 결심을 하듯, 인생이 한 바퀴 돌아온다는 환갑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습니다. 또 사실 임기가 끝나서 물러나는 것보다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멋지잖습니까."

 

 

 

 

 
 

그 때가 2001년 11월.
그의 이야기는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체면치레를 벗어 던진 용감한 결단이라며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얼마나 가겠어?' 하는 냉소적 시선을 던지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6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잿빛 택시기사 제복을 입고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다.

 

지난달 말 오후 1시께 서울의 한 기사식당.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공기밥 두 그릇을 순식간에 게 게눈 감추듯 비워냈다.

 

"예전에는 제육볶음이란 음식이 그렇게 맛있는지 몰랐어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열심히 일하다가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지요. 아니,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맛있어요. 이게 바로 택시 운전(노동)이 주는 기쁨 아니겠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택시 예찬론'을 폈다. 금융계에 몸 담았던 40년 가까운 세월보다 택시기사로서의 6년 세월이 훨씬 값지다고 자랑한다.
뭐가 그리도 좋을까 물었다. "금융계에 만 39년을 근무했는데도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저 '편안하게 잘 지냈다' 정도랄까. 그런데 택시운전은 달라요. 매일 아침 대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니 흥미진진하죠." 한마디로 매일매일 색다른 나날. 자연히 할 말이 많아졌다.

 

한 평 남짓한 택시 안에 앉아 있지만, 그가 하루하루 만나는 '세상'은 들여다볼수록 오묘하기만 하단다. 그의 택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잠시나마 머물다 간다.

 

 "며칠 전 50대 아저씨가 아들을 데리고 탔는데, 아들이 좀 이상했어요. 알고 보니 2년 전 집 나갔던 아들이래요.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지 '멀쩡하던' 아들이 정신질환을 갖게 된 듯했어요.

 

그런데도 아저씨는 부인한테 전화해 '아들을 찾았으니 걱정 마라'며 기뻐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이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싶어 새삼 숙연해졌어요."   그의 손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길 안내를 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나면서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고, 자식들한테 재산을 물려준 뒤 박대당하는 할머니를 보면서는 함께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매일 좁은 택시 안에서만 있으니 답답할 것 같지만, 천차만별 손님들과 수만 가지 사연을 나누다 보면 지루함이 없습니다. 이제야 인생이 뭔지 배우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가 왜 굳이 택시기사를 택한 것인지는 계속 궁금했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던 사람이 왜 자진해서 앞좌석으로 옮겨왔을까. "택시보다 오래 할 수 있는 직업이 있습니까.

 

서울의 택시기사 중에는 88세 된 분도 있어요. 80이상은 38명. 75세 이상은 800명이 넘지요. 이처럼 정년퇴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있나요? 큰 아들(비행기 조종사)에게도 큰 소리쳐요. '넌 은퇴 걱정 마라. 개인택시 물려줄 테니까' 하고 말이에요."

 

진담 같은 농담도 이어졌다. "며느리에게 인기 있는 직업 1위도 바로 택시기사랍니다. 늘 주머니에 현찰을 갖고 다녀 손주들에게 용돈을 잘 주니까요."

 

기실 택시기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그리 우러러 보는 대상이 되지 않음을 그도 잘 알고 있다.
친구들 모임이 있어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가 택시를 몰고 왔다고 주차요원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생이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슬금슬금 그를 피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상관없단다. "무시하는 건, 그 사람들 사정이지, 뭐." 그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노년의 삶이 즐거워진다"고 했다.

 

소위 '잘 나가던 시절' 그는 40만원짜리 발리 구두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의 양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전혀 딴 판이다. 8,000원짜리 바지에 1만원에 구입한 비닐 구두가 그리 편할 수가 없다고 한다.

 

"가죽이라고 해서 샀는데 비닐 구두인 것 같아요. 걸레로 한 번 쓱 닦아주면 되고, 어째 누가 밟으면 더 깨끗해져요." 그가 씩 웃었다. "전 늘 입버릇처럼 말해요. 늙을수록 '거지'같이 살자고요. 남 신경 안 쓰고 얼마나 편한데요. 하하."

 

이는 '일'과 관련해서도 매한가지다. "외국에선 대학 총장이 물러나면 수위도 하고, 정원사도 하고 그래요. '우리 학교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고 긍지를 갖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안타까워요. '보증 잘못 서 망했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측은해 하죠.

 

그런 틀에서 벗어나야 홀가분해질 수 있어요."

 

그는 개인택시가 나오던 날의 설레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남들에겐 그 흔한 개인택시 한 대가 더 늘었을 뿐이겠지만,
그의 인생엔 그보다 더 또렷한 방점이 없다. 장가간 날보다 더 기뻤어요.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서 여기저기 전화하고, 주차장에 세워둘 때도 혹여 흠집이 날까 구석에 세워두고, 집으로 들어가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곤 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왜 힘든 날이 없었겠어요.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아가며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억지로 택시에 오르기도 했지요."
그렇게 법인택시 3년을 '만근'하고서야 갖게 된 개인택시였으니 "그렇게 이쁜 차는 처음 봤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늙어서 기운이 다 없어질 때까지' 운전대를 잡을 생각이라는 김 씨. 그는 은퇴 후 삶의 설계를 '경제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강조한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를 정말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서 쓸모없어졌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폐기물로 만들지 않으려면 직장은 잃어도 절대 일은 놓으면 안 됩니다."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늙을수록 '고상한 일'과는 거리가 있는 일을 택하자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머리 쓰는 일은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 놓고, 우리는 땀 흘리는 기쁨을 맛보자고요. 자고로 나이들수록 육체를 달달 볶아야 해요. 그냥 놔둬봤자 병들고 살찔 일밖에 더 있습니까."

 

그래도 '돈'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그도 재테크를 하는지를 물어봤다. 금융 전문가 출신이니 오죽 잘 해뒀을까 싶었다.

 

답은 무척 솔직하고, 또 의외였다.
"택시운전으로 월 100만원 정도 벌어요. 열심히 일하면 그 두 배도 가능하지만, 그러면 너무 여유가 없어져 일이 힘들게 느껴질 것 같아 쉬엄쉬엄 하죠. 집이 있고, 연금도 80만원 정도 나오니 아내와 둘이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어쩌다 운 좋게 장거리 손님이 탄 날엔 집에 돌아가 아내와 통닭을 시켜 먹는데 그런 데서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죠." 돈은 '약간' 모자른 듯 한 게 어찌 보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도박' 일수 있는 주식 투자 등에는 관심이 도통 없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러면 그토록 즐거운 택시인생에서 애로점은 뭐냐"고 슬쩍 물었다.

 

화장실 문제죠. 화장실 가려고 하면 손님이 타고 해서 기본적인 생리문제를 참아야 할 때가 많아 고민했지요."

 

그런데 최근 해결책을 찾았다고 했다. 상황이 아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단다.
"택시기사는 늘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 하체가 약해지기 쉬우니까, 화장실 가는 걸 이용해서라도 운동하라고 하나님이 신호를 보내주시는 거라고요. 그래서 때가 되면 '이제 운동할 시간이구나' 하고 기쁘게 생각해요."

 

택시 운전의 단점인 '취객 상대' 문제에 대해서도 여유롭기 그지없다. "술 취한 사람한테 험한 일 당할까 걱정된다고요? 모르는 말씀이에요. 택시기사한텐 술 취한 사람이 VIP고객이죠. 술 안 마신 사람들이야 뭐 하러 자주 택시를 타겠어요?"

 

퇴직 후에도 '팔자가 좋아' 항상 (버스 등 타지 않고) 택시만 타고 다닌다는 김기선 기사.
그가 멋진 인생의 후반전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 '눈높이를 낮추고, 욕심을 뺀 삶' 그것에 답이 있었다.

 


<머니 투데이 배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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