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뉴질랜드에서 84세에도 택시운전 본문
뉴질랜드의 6월은 온갖 나무들이 때때옷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계절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단풍잎이 비바람에 흩날려 허공에서 소용돌이를 친다.
그런 와중에도 이른 아침부터 공항으로 향하는 발길들이 부산하다. 오전 들어 벌써 세 차례나 들른 국제선, 국내선 출발지 입구가 11시를 지나는 데도 활기가 넘쳐난다.
인구 100만 도시, 오클랜드공항이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관문답게 분주하다.
공항을 빠져 나오다 근처 주유소에 들러 택시에 연료를 채우고 나니, 운전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 달라며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스스로에게 고용된 이 몸을 누가 챙겨주나. 맘 씀씀이가 잠시 쉬었다 가잔다.
커피 한 잔을 들고서 창밖을 보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선명한 무지개가 공항 활주로에서 뻗쳐 나온다.
옆을 보니 창 밖 풍경 생각에 잠긴 채 지긋이 바라보던 동료 운전기사가 커피를 들며 빙그레 웃는다. 택시의 대 원로격인 앤드류 할아버지다.
“뭘 생각하세요?” 라고 물으니 이번 주말 아홉 번째 증손 돌 선물로 뭘 줄까 생각중 이란다.
“증손이라고요?” “Yes! Great grandson!” 그냥 손자가 아니란다. 손자 15명이 이미 다 장성했단다. 아들 딸 5명에 손주 15명에 증손이 9명이라니... 어마 어마하다. 실례인줄 알면서도 궁금해서 조심스레 다시 묻게 된다.
매일 새로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 할 수 있어
“아니 그럼 몇 년도에 태어나셨는데요?” “1924년!”
그럼 만으로 해도 84세? 원 세상에나 평소 그렇게 안 봤는데. 잠자코 들어보니 택시운전 이력이 엄청나다.
1950년, 그러니까 우리 고국 6.25 전쟁 때 26세 나이로 시작해 1970년 46세까지 20년 택시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직업을 바꿔 잔디 깎는 기계 만드는 회사 기술자로 14년 근무하다 1984년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은퇴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 그냥 생활하기에는 무기력 한 것 같아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해 일하다 보니 24년이 흘러 84세 오늘에 이른 것이다.
택시 운전 경력 44년! 84세?
아직도 정정해 보이는데, 안경을 쓰지 않고도 운전이 가능한 상태이고 요즘도 아침 일찍 5시나 6시에 시작해 11시쯤 집에 들러 2-3시간쯤 쉬고 점심 들고 오후 5시쯤에 일을 마친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 낮에 운전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택시인생 이력을 들으며 의아해하고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묻는 새까만 후배가 기특해 보였는지 등을 두드려준다.
나이로 봐도 32년 후배요, 택시운전 경력으로 봐도 34년 후배니 어디 감히 견주기나 할 군번인가?
자기 주변 친구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먼저 돌아갔다 하신다. 이유를 물으니 노후에 자기 몸에 맞는 꾸준한 일거리가 없어서였을 거라 말씀한다.
“택시를 그렇게 오래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점은 뭐가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첫째로 매일 새로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 할 수 있어 좋으시단다. 그래서 이젠 생존 수단의 택시 운전이 아니라 생활의 길잡이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별별 사람, 참 안쓰러운 모습, 온갖 일들을 만나다 보니 좋을 때도 있지만 가끔씩은 자기 연민(?)같은 것도 느끼신단다.
할 일이 있다는 것
둘째는 매 순간(상황 판단하는) 머리를 쓰다 보니 정신건강에도 좋고 노화가 더디게 온단다.
셋째는 적당한 수입이 있어 가족들이나 종친 모임, 교회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넷째는 많은 책도 읽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시간에 감사드릴 수 있어 좋고,
다섯째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을 마치고 쉴 수 있어 자유로워서 좋으시단다.
얘기를 듣고 보니 행복한 노후를 맞아들이고 누리기 위한 조건 1순위가 ‘할 일이 있다’는 것. 할일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너무 한가하면 딴 마음이 생기기 쉽고 생활리듬이 깨지게 마련이라고. 언제 완전한 은퇴를 할지 물으니, 손님의 안전을 최우선 책임 져야 되는 일이기에 택시 운전 면허증 갱신에 따른 건강에 문제가 없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겠다고 한다.
84세에도 현역으로 일한다?
아직껏 땀 흘려 일할 수 있고 세금도 내며 건강도 따라줘서 고맙다고 말씀하는 모습에서 가을비에 잘 닦여진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거리듯 빛이 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있다면요?” 물어보니 ‘가족’이 첫째고, ‘감사’가 둘째이며, ‘건강’이 셋째라 하신다. 아직도 저녁 무렵 동네를 걸으며 그날 일을 생각해보고 신체 건강도 다지게 되어 좋다 하신다.
“오랜 안전 운전 경력에 비결이 있으시겠지요?” 여쭤 보니 ‘흐름운전’에 따르라고 하신다. 길을 알면 ‘흐름’에 맡기게 되고 자연스런 운전이 된다고.
입은 닫고 귀는 열고 주머니는 내어주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던 게 마침 생각난다.
그 하나가 ‘곤충의 눈’이고, 그 다음이 ‘새의 눈’이고, 마지막이 ‘물고기의 눈’이라고.
곤충의 눈은 바로 눈앞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이고, 새의 눈은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시야이며, 물고기의 눈은 세상 흐름을 파악 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가진 시야라고 한다.
앤드류 할아버지야말로 이 세 가지 눈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시야를 가진 분이라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고 주머니는 내어주라는 옛말처럼 생활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계신 분이다.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듣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니 하늘 소리도 듣고 땅의 소리도 들으며 천수를 누리는 것 같다.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선명한 무지개 옆에 또 한 줄기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쌍무지개다. 짧은 글 (긴 여운의) 한자락이 아름다운 쌍무지개 위에 걸려있다.
"자기 연민의 해독제는 바로 감사한 마음이다."
백동흠(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 사는 교민이며,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잔잔한 글을 뉴질랜드 타임즈에 기고하고 있다.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http://cafe.daum.net/cchereandnow 백동흠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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