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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시세상

달리는 황혼, 자극이 있어 살맛나는 택시

희망연속 2008. 5. 7. 16:56



젊은시절 화려했던 경력을 뒤로 하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택시를 모는 김기선 전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 우세웅 전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시설본부장, 박세구 전 삼립식품 부사장, 정광조 전 대우증권 지점장(왼쪽부터). 이들은 점심식사 후 마시는 자판기 커피 한잔이 호텔 커피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다. 이상훈기자

 


서울 강남구 뱅뱅사거리 근처에 있는 한 기사식당. 택시 운전기사 김기선씨(62)와 동료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에겐 점심 때가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내가 지금 어디 다녀온 줄 알아? 인천공항 왕복 손님 태우고 오는 길이야. 하루 일당 다 벌었지.”

김씨가 자랑을 늘어놓자 옆에 있던 박세구씨가 “저 친구는 운도 좋아”라고 했다. 그 말을 받아 김씨가 “운수(運輸)업이 괜히 운수(運數)업인 줄 알아? 운도 실력이라고” 하는 바람에 함박웃음이 터졌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여느 택시운전기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고교(선린상고·현 선린정보고) 동창으로 모두 나이가 같은 이들은 다채로운 경력을 지니고 있다.

김씨는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를 지냈고, 박씨는 삼립식품 부사장을 역임했다. 우세웅씨는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시설본부장을 지내다 택시운전기사로 전직했다.

 

위암 수술 이후 운전대를 잠시 놓은 정광조씨도 대우증권 지점장 출신이다. 박씨만 법인택시를 몰고 모두 개인택시 운전기사이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골프 또는 등산을 즐기며 여유롭게 노년을 즐길 수도 있는 이들이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 예순을 넘긴 나이에 택시운전기사가 된 이유가 뭘까. 김씨는 ‘횟집 이야기’를 꺼냈다.

“횟집에 가면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곧바로 회를 쳐 손님에게 내주잖아요. 그런 물고기들은 죽은 생선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횟감용 물고기들을 상어·뱀장어 등과 함께 수족관에 넣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회맛이 달랐을 겁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물고기와 그저 물에 둥둥 떠 있던 물고기는 회를 떠도 다르지요.”

김씨는 은퇴하면 택시운전기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30여년 전부터 했다고 한다. 환갑 기념으로 개인택시를 뽑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3번이나 연임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던 저축은행 대표 자리까지 박차고 나왔다.

 

함께 택시를 모는 고교 동창들은 모두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삼립식품 부사장을 지낸 박씨도 예전엔 운전기사가 모는 승용차의 뒷좌석에만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박씨는 “핸들을 처음 잡았을 땐 후진도 제대로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택시운전기사로 변신해 처음 핸들을 잡았을 땐 고충도 적지 않았을 듯싶었다. 낮에는 상습 정체에 시달리고, 밤에는 취객들을 태운 뒤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잦을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고 했다.

“가끔 술취한 사람들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택시운전을 하면서 ‘없이 사는’ 서민들일수록 더 착하고 정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지요.”

그때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던 우씨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이 전화 누구에게 걸려온 줄 알아? 어제 태웠던 손님인데 7,000원이 부족하다며 내 은행 계좌로 부쳐주겠다고 하더군. 반신반의했는데 방금 입금했다고 전화가 왔네.”

이들은 택시를 몰다보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서민경제를 체감할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지지난해보다 지난해가, 지난해보다 올해가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엔 20명 정도 태우면 하루 일당이 떨어졌는데 요즘엔 30명을 태워야 합니다. 서민들의 지갑이 얇아진 탓인지 장거리 손님이 거의 없습니다.”

우씨는 요즘엔 택시 타는 사람들마다 ‘집값 폭등’ 얘기를 한다고 했다.

“집값이 너무 올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집을 마련하려고 평생 2억원을 모았는데 집값이 올라 꿈을 접어야 할 것 같다는 손님의 말을 들을 땐 저 역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세상 얘기를 한참 하던 이들은 점심 메뉴로 시킨 제육볶음에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웠다. 점심식사 뒤 이들은 다시 거리로 나설 채비를 갖췄다.

 

각자의 택시에 오른 뒤 서로에게 “안전운전!”이라는 인사말을 건넨 뒤 핸들을 잡았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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