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택시기사가 손님 납치범으로 몰린 사연 본문
아침시간에 강남에서 서대문구 가는 콜을 잡았더니 여자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지 말고 집앞 지하철역 대로변에서 기다려달라. 그래서 도착 후 비상등을 켜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초등학생 5~6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택시에 탔습니다.
아마도 엄마가 콜을 불러 준 모양. 이런 일이 흔하죠.
내비게이션 대로 동부간선로, 강변북로, 신촌 쪽으로 가겠다고 아이에게 말을 하고 출발했습니다. 휴일 다음날인데도 도로가 의외로 잘 빠지더군요. 거의 막힘이 없었습니다.
강변북로 이촌동쯤 지나고 있었을까, 전화벨이 계속 울렸습니다. 무음으로 해놓기는 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죠. 차 운행 중에는 휴대폰 통화를 해서는 안되므로 받을 수도 없었고, 강변북로를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이어서 전화를 받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전화벨이 계속 울렸고, 다른 번호에서도 전화가 오더군요. 그래서 서강대교 북단에서 신촌으로 진입해 신호등 앞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손님인 초등학생 어머니였습니다. 택시기사 맞느냐, 어디를 달리고 있느냐, 아들은 있느냐. 바꿔 달라.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아들이 휴대폰을 엄마 승용차에 놓고 내려서 전화를 받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건네 준 전화에서 아이 엄마는 아들과 전화가 안돼 경찰에 신고했다며 전화를 끊더군요.
예? 경찰에 신고요? 어안이 벙벙한 순간 다른 전화가 와서 받았습니다. 경찰인데 아이 납치 신고가 들어왔으니 택시를 가까운데 주차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납치? 저는 아이 엄마와 통화한 내용을 경찰에 말했지만 신고가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 엄마는 아이의 등교를 위해 택시를 불렀고, 아이를 승용차에 태워 택시 근처에 내려줬는데 아이는 깜박 휴대폰을 엄마 차에 놓고 내렸고, 엄마는 회사에 출근했다가 아이가 잘 등교했는지 아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았고, 택시기사인 저도 전화를 받질 않자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한것이죠.
경찰의 요구대로 근처 지하철 역에 택시를 주차하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아이 학교 가는게 맞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학교로 오라고 해서 목적지인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이런. 경찰 순찰차 몇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기다리고 있었고, 경찰들이 저를 둘러 싸고 이것 저것 조사? 취조?를 하더군요.
몇 십분이 지났고, 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그러라고 해서 택시를 몰고 학교를 뻐져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경찰의 기동력은 참 대단하죠.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태원 핼로윈 참사 때에도 이렇게 기동력을 발휘했더라면 160여명 꽃다운 청춘들의 목숨은 그렇게 스러져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이없는 봉변아닌 봉변을 당한 저는 한마디로 기분 드러웠습니다.
아이가 혹시 납치되지 않았을까 염려되어 기민하게 경찰에 납치신고 한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와 통화가 되어 사태 파악이 됐으면 즉시 경찰에 취소를 했어야죠.
바쁜 시간에 경찰력만 낭비시켰고, 저 역시 뒷통수를 망치로 얻어 맞은 격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콜을 불러 택시를 타면 운행 경로가 실시간으로 휴대폰에 그대로 나옵니다. 콜을 부르면서도 그것도 몰랐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구요, 아이가 전화를 안받으면 잠 자느라 그럴 수 있는 것이고, 택시기사가 전화를 안받으면 운행 중에 전화받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운전자라면 모를리가 없어야죠.
또 초등학생 고학년 남자아이를 아침시간 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납치 운운 한다는게 넌센스 아닌가요. 자기 자식만 소중한게 아니고 경찰과 택시기사의 시간 역시 소중한 것을 알아야죠.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조차 전혀 없었다는 것.
너무나 황당하고 기분 드러워서 전화로 쓴 소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말 참고 또 참았습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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