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연개소문 유적비 본문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공원 입구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커다란 비석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가 고려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대막리지란 고구려 시대의 관직으로 실질적으로 나라의 거의 모든 권력을 지닌 왕 다음 가는 자리였다. 요즘 국무총리라고 할까.
이 비석의 내용은 이렇다.
“개국의 성역이자 선사 시대의 유적지인 이곳 강화는 천하 통일의 큰 뜻을 품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665)의 연고지이다.
1932년에 발간된 강화 향토사 『강도지』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위엄어린 얼굴에 당당한 풍채는 뭇 사람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터와 자취가 남아 있다.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당(唐)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왕으로 세 우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잡았다.
그 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집권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군(軍)과 민(民)이 하나가 되어 요수(遼水)와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싸워 당(唐)의 함선 4백여 척과 3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
특히, 안시성 싸움에서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당나라 내륙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가 화북(華北)지방을 정벌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이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숭조회에서 비석을 세우다. 1993년”
하지만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다만 강화도의 향토사지인 『속수증보강도지』에 “연개소문은 고려산 밑에서 출생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물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대중을 현혹시켰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려산의 우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성도 ‘못 연(淵)’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연개소문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우물[五井], 그리고 집터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민간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고 이 또한 대단히 좋지 않은 것 뿐이다.
즉, 임금(영류왕)을 죽인 잔악 무도하고 포악한 신하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신라를 정통으로 만들기 위해 신라와 끝까지 적대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역사를 일부러 좋지 않게 꾸며 놓은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다.
구한말 언론인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위대한 혁명가 연개소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백암 박은식(1859~1926)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탁월한 전략가요, 나라를 구한 영웅 연개소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뒷날,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고려산 소나무는 얽히고설키었는데
일찍이 이곳은 호걸이 말 타고 놀았었다고
풍우같이 말을 몰아 요동벌을 진동하였다니
아직도 막리지 개소문의 전설이 남아 있네
<봉촌(鳳村)>
고려산 진달래를 보러 갔다가 정작 진달래는 구경도 못한 채 돌아 왔으나 우연히 고려산 인근이 연개소문의 고향이란 사실을 알게된 점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잘 알다시피 고구려 말기,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쇠약해져만 가는 고구려를 이끌고 중국에 당당히 맞선,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명장입니다.
당나라와 무조건 화친을 주장하는 부패하고 힘없는 왕인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채 전권을 행사하였기에 후세인들로 부터 비판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연개소문을 모함한 측은 주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로서 무조건적인 모화주의(慕華主義)에 물든 채 연개소문의 과(過)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점은 많이 아쉽습니다.
아울러 연개소문의 고향이 강화 고려산이 아니라 중국 고려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도 있더군요. 고려산이란 이름을 지닌 산이 여러군데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강화도 지역과 고구려 사이에 지역연고가 별로 없었다는 설이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럴 정도로 연개소문에 대한 사실관계는 자료가 부족해서 거의 추리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고려산이 연개소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해도 고려산은 고려산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것도 완전히 비틀어서 자기 합리화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이건 뭐.
'다시 찾고싶은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전도비에서 교훈을 얻다 (0) | 2019.06.09 |
---|---|
인왕산과 윤동주 문학관 (0) | 2019.06.09 |
강화 고려산 진달래 (0) | 2019.04.13 |
세빛섬 채빛퀴진 (0) | 2019.03.02 |
방가 방가, 한강 무궁화동산 (0) | 2018.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