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와 '정약전의 자산어보'

이번 추석은 장장 6일 연휴였죠. 저같은 택시기사는 긴 연휴가 달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추석 당일날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밤 10시경에 가까운 지하철역 가는 젊은 20대 남녀가 탔습니다.
 
무거운 가방을 싣고 타기에 추석날 밤에 고향 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여행을 가는 손님이었습니다.

 

추석날 밤에 떠나는 여행, 요즘 젊은이들의 낭만, 여유, 모두 부럽기만 합니다.
 
여자손님이 제 옆자리에 타더니 아저씨 우리 여행가는 길이에요 하고 흥겨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마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실어서 약간 미안한 마음에 그러려니 했는데 아저씨, 혹시 흑산도 아세요? 거길 가거든요.
 
흑산도? ㅎㅎㅎ, 흑산도 모르면 간첩인데요, 남도 끝 다도해에 있는 멋진 섬 아닙니까. 좋은데 가시네요. 흑산도는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유명하잖아요. 정약전 흔적을 찾아 보는 것도 좋겠네요.
 
정약전, 자산어보?????
 
그 젊은 손님은 자산어보와 정약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국사책에 나오지 않나요?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조선 말기의 실학자인 정약전(丁若銓)이 지은 어류도감입니다. 물고기의 생태에 관한 세계 최초의 해양서적이라고 하죠. 자산(玆山)은 흑산을 가리킵니다. 검을 현(玄)이 겹쳐 있으니 많이 검다는 뜻이겠죠.
 

흑산도에 상록수가 대부분이어서 멀리서 보면 검게보인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하더군요. 또 흑산도 앞바다가 유난히 푸르고 깊은 나머지 검게 보인다고 합니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도 유명합니다. 두 형제는 남양주에서 태어나 과거를 통과하여 정조 대왕의 사랑을 받는 유명한 학자였으나 정조 사후에 천주교를 믿는 것이 드러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두 형제가 나중에 믿음을 그만두었기에 죽지 않고 유배형에 그치게 되었답니다.
 
동생인 정약용은 외가가 있는 강진에서, 정약전은 신지도, 우이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자산어보를 비롯해 다른 저서도 남겼습니다.
 
자산어보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기에 그런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영화씩이나 만들지? 의문을 가졌더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정말 역시 영화인들의 창의성, 예술성은 다르구나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흑백영화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마치 한폭의 수채화처럼 담담하고, 흑산도 지방의 멋진 풍광이 잘 어우러진 수작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정약전은 설경구가 맡았죠. 말이 필요없는 중후한 연기를 보여 줬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장창대. 창대역은 변요한이 연기했습니다. 창대는 자산어보 서문에 정약전이 흑산도 원주민 청년인 창대의 도움을 받아 책을 썼다라고 몇줄 언급되어 있다는데 배우 변요한이 캐릭터를 잘 소화해 냈습니다.
 
변요한은 나중에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한산, 용의 출현'에 발탁되어 왜군 장수 와키자카 역을 아주 잘 연기했더랬죠. 
 
정약전을 수발하는 거가댁은 영화 기생충에서 열연했던 이정은이 연기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나중에 정약전과 맺어져 아이까지 낳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지에서 관리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도 낳게 됩니다.
 
 

 
 
영화촬영 장소는 당연히 흑산도여야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인근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에서 찍었다고 합니다. 특히, 정약전이 생활한 가옥은 메인 세트로 도초도에 만들어졌고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네요.
 
정약전은 16년 유배생활 끝에 58세를 일기로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강진에 유배됐던 동생 정약용은 약 2년 더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게 되니 아쉽게도 두 형제는 유배를 간 이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 자산어보를 만든 이준익 감독에게 인사를 하는게 순서일 것 같았습니다. 자산어보가 아무리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한들 이렇게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 황산벌, 사도, 동주 등과 같이 시대성과 역사성을 지닌 사극 영화를 많이 찍은 실력있는 감독입니다.

 

그리고 추석 명절에 멀리 흑산도로 여행가면서 제게 자산어보와 정약전을 다시 일깨워 준 그 손님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