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항우(項羽)'와 권토중래(捲土重來) 본문
勝敗兵家事不期(승패병가사불기):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예측하기 어렵나니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어찌 되었을지 알수 없으리
권토중래(捲土重來)는 땅을 말아 다시 오다. 한 번 패했다가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오다. 실패 후에 재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권토(捲土)’란 부대가 말을 달려 전진할 때 일으키는 흙먼지가 멀리서 보면 마치 땅을 말면서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출전>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이 천하를 놓고 다투었던 초한 전쟁은 5년간 지속되다가 유방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전쟁 막바지에 쌍방은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유방이 협정을 위반하고 항우를 공격했다.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유방의 한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는데, 밤에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이미 싸움에 진 것으로 착각하고 낙담하고 말았다.
궁지에 처한 항우는 800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망을 뚫었다. 하지만 회하를 건넌 후 남은 군사는 100여 명뿐이었다. 이들은 음릉(陰陵)에 이르러 그만 길을 잃고 말았는데, 한 농민에게 속아 왼쪽 길로 도주하다가 늪을 만나 시간을 허비하고, 다시 되돌아와 동성(東城)에 이르렀을 때는 고작 28명이 남아 있었고, 수천의 추격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항우는 이 28명을 4대로 나누어 돌진하여 수없이 많은 한군을 사살하고 다시 뭉쳐 포위망을 뚫고 계속 동쪽으로 도주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동성쾌전(東城快戰)인데, 여기에서 항우의 부하들은 단 2명이 죽었을 뿐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오강(烏江)에 이른 사람은 고작 26명.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놓고 말했다. “강동이 작다고는 하지만 아직 천 리 땅이 있고 몇 십만 백성이 있으니 왕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빨리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 신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한나라 군대가 와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항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강을 건너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동정하여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정장에게 자기가 타던 말을 선물했다.
항우의 부하 26명도 모두 말에서 내려 한군과 또 한바탕 치열한 접전을 벌여 항우 혼자서만도 100여 명의 한군을 사살했다. 치열한 접전 중에 항우는 옛 부하였던 한의 장군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천금의 상과 1만 호의 봉읍이 걸린 자신의 수급(首級)을 바쳐 공을 세우라고 소리쳐 말하고 자결하고 만다.
이로써 일세영웅 항우는 장렬하고도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항우의 나이 31세 때였다. 왕예(王翳)라는 인물이 항우의 목을 베어 가졌고, 여마동 등 4인은 항우의 사지를 갈라 가져갔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온다.
항우의 초나라는 모두 9개의 군(郡)을 관할했는데, 항우가 패전을 하고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5개의 군은 여전히 항우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하여 후인들 중에는 항우가 오강을 건너 재기를 노렸어야 했다며 안타까워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강을 건넜어도 별 희망이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전자에 해당하는데, 그는 오강을 유람하다가 〈오강정(烏江亭)〉이란 시를 지어 일세의 영웅 항우가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가지 않고 자결한 것을 아쉬워하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수치를 끌어안고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이 대장부지
강동의 자제들 뛰어난 이 많았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 왔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리.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耻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두목의 이 시에서 ‘권토중래’가 유래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으로는 송나라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을 들 수 있다. 그 역시 〈오강정〉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는데, 두목과는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百戰疲勞壯士哀
中原一敗勢難回
江東子弟今雖在
肯與君王捲土來
수많은 싸움에 지친 장사들의 슬픔이여
중원의 싸움에서 패하고 나니 세를 회복하기 어려워라
지금 강동의 자제들이 살아 있다고 해도
대왕과 더불어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올수 있으리오.
오강정은 안휘성 화현(和縣) 동북의 오강포(烏江浦)로, 바로 항우가 자결한 장소이다. ‘정(亭)’이란 진한(秦漢) 시대의 말단 행정 구역으로, 10리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이의 장을 정장이라 했다. 한고조 유방도 정장 출신이었다.
<용례>
사업에 한번 실패했다고 그렇게 술로 세월을 보내면 어떻게 하나. 다시 힘을 내 ‘권토중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교훈>
권토중래는 실패 후 다시 노력하여 재기하는 것을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 항우가 만약 자결하지 않고 전력을 가다듬어 다시 돌아왔다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으리란 희망적인 생각에서 당나라 시인 두목이 오강정에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그렇다. 한번 실패했다고 성급한 포기는 금물이다. 다시 용기를 내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으려니.
'훌륭한 책과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재 '마음' (0) | 2018.02.14 |
---|---|
정약용 '혼자 웃는 이유 (獨笑)' (0) | 2018.02.14 |
너무 서정적인 노래, 윤수현 '꽃길' (0) | 2017.06.21 |
이해인의 시(詩)가 있는 서부역 행복마트 (0) | 2017.03.22 |
영원한 것은 없다 (양성우) (0) | 2016.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