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완도군 보길도 본문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만들었던 곳이다.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을 피해 세상을 떠나 은둔하고자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해남지역의 손꼽히는 명문권세가였던 윤선도가 병자호란을 피해 제주도로 갔다는 것은 말하자면 도망이 아닐까. 찜찜하다.
윤선도는 보길도 부용동에 인공호수와 정자를 지어놓고 13년간 머물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세연정이다.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를 이용해 만든 인공연못인 세연지는 우리나라 조경문화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보여주는 걸작.
이곳에서 앞산으로 10여분을 올라가면 옥소대라는 바위가 나오는데 윤선도는 이곳에 무희들을 올려놓고 춤을 추게 하고 세연정에 비치는 그 그림자를 즐겼다 한다.
이 역시 돈바람이겠지. 요즘도 돈걱정 없는 이들은 여행이나 다니고 유유자적하지 않는가.
65세의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으며 1671년 85세로 보길도의 낙서재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가는 배위에서 찍은 땅끝전망대 모노레일
해남 땅끝에서 배편으로 약 30분. 보길도로 바로 가지않고 노화도 산양진항에서 내려 보길대교를 지나 보길도로 들어가는게 좋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해남 땅끝전망대
보길대교가 생겨 교통편이 훨씬 좋아졌다.
전에는 해남에서 1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보길도로 가야했던 것이 보길대교가 생겨 해남에서 노화도 산양진항까지 불과 30분.
산양진에서 보길도까지 약 15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길도 특유의 느린 풍광을 보노라면 도시생활에서 피곤에 찌든 눈과 머리가 어느새 조용해지는 느낌이다.
부용동 윤선도 유적지 세연정. 이곳에서 배를 띠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보길도 중리해수욕장 주변 선백도 마을 해변가 암석에 선조~숙종대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가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 써놓은 글이 있다.
이름하여 글씐바위.
암벽엔 흔적만 암아있고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보길도에 갈때까지만 해도 몰랐으나 여행도중 안내판이 있기에 찾아 가봤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있구나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으리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밖에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왕세자 책봉문제로 미움을 사 귀양가는 길에 신세를 한탄하여 쓴 글을 후세 사람이 암벽에 새겨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더욱이 보길도에서 먼저 살다 죽은 윤선도는 송시열보다 20세 정도 많지만 당시 4색당파의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서로 등지고 싸우던 처지였는데.......
보길도는 고산과 우암의 이러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둘다 80을 넘어 살았으니 천수를 누린셈이다. 당시에는 60만 넘겨도 대단한 때였으니.
물론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약을 먹고 죽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넘게 등장한다는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상소하다가 귀양을 가게되고 결국 사약을 받게 된 것은 왕과 나라를 위해 그리 했을까.
전부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렇게 했을 터. 다 부질없는 일인데.
송시열의 글을 새겨놓은 비문.
송시열의 글쓴바위로 들어가는 길. 산책로 처럼 잘 꾸며놓았다.
ㅋㅋㅋ, 내가 좋아하는 쏘울이 여기선 택시로 사용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