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17년된 르망 본문
지난 17년 동안 21만3천km를 달리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친구 같고 애인 같던 르망을 오늘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냈습니다.
태백산이 오토조인스에서 글 쓰며 껌뻑하면 17년 20만km넘는 차라고 말하곤 했던 그 차입니다.
한달도 더 넘게 고민 고민하다 결국 그렇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를 대신할 다른 새 차가 1호차의 자리를 차지한지 이미 한달이 다되어 갑니다.
주행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새 차나 다름없는 멀쩡한 차인데 그를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밤잠을 설치며 고민 많이 했습니다. 참으로 못할 노릇이었지만, 앞으로 점점 그를 타지 않을 텐데, 10년 후 20년 후까지도 함께하며 관리할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그미의 말에 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소식을 들은 친구가, 그 유명한 르망을 없앤다고? 자기를 주면 안 되겠냐고 몇 번이나 전화했었지만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차를 태백산처럼 아끼고 사랑해줄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천덕꾸러기 되게 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조용히 보내주는 게 그동안 나를 정성껏 모신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이곳에서 활동하던 neon님께서 나중에 르망을 꼭 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이 차를 그렇게 사랑해 주실 것 같지만,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다음주, 내일, 내일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오늘 대사를 결행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새벽부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내 손으로 직접 목욕은 시켜서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표면 도장도 아직 처음 그대로입니다. 찌그러진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잔 흠집도 별로 없이 광택도 만족한 만큼 잘 나고 있습니다. 글자가 잘 안보여서 도색은 몇 번 했지만 번호판도 처음 그대로입니다. 번호판을 페인트칠해서 쓰는 운전자가 있을까 싶네요.
바탕색이 조금 더 진한 초록색이라는 것을 빼고는 언뜻 보기에는 원래 번호판과 크게 다르지 않기는 합니다. 워낙 공들여 글씨를 덧칠해서요. 등록증에 더 이상 정기검사 내용을 쓸 칸이 없어도 번호판을 바꾸면 차량 번호가 변경된다고 해서 바꾸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배기가스 검사에서는 신차 못지않은 결과가 나와서 검사원이 검사기계가 고장 났나 하고 의심하기도 했었습니다. 엔진룸을 열어봐도 기름 흘린 자국하나 없이 반짝반짝합니다.
엔진오일을 1년에 한번 1만km 이상에서 갈아 주지만 불평한마디 없습니다. 얼토당토하게 엔진오일을 먹으려 덤비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몸이 덜 풀렸다고 미적거리지 않습니다. 주인을 길거리에 버리고 못가게다고 버틴 적도 없습니다.
몇 년 전에는 오토미션에 약간의 변속충격과 함께 변속지연 현상이 발생하여 출발이 좀 굼뜨더니. 2만8천원짜리 보약 한재 먹더니 말짱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20만km 이상을 이렇다할 고장 하나 없이 달려준 오토미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어컨도 손시려울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잘도 나옵니다. 남들이 흔히 하는 에어컨 가스를 보충한 적도 없습니다. 몇 년 전에 단 한번 교환한 것이 전부입니다. 타이어와 배터리도 새 거로 교환한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브레이크 패드를 직접 교환한지는 3달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직접 방음작업도 하고, 쇼바도 갈고, 엔진마운트도 교환하고, 썬팅하고, 스트럿바도 달아주었습니다. 전국에 수배까지 하며 어렵사리 구해서 웨더스트립을 모두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폐차하고도 남을 13년 정도 되었을 때 했던 일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3년 동안이나 안하고 다니다가, 다 늙은 차에 썬팅하고 스트럿바 단다고 주위에서 웃데요. 꼭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보다도 그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고속도로에 나가도 속도나 파워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연비도 고속도로에서는 17km가 넘고 시내에서도 아무리 못나가도 12km는 기록합니다. 120km/h 넘게 신나게 달려도 차에 걸맞지 않게 장착한 고급 데크와 CD player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그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주인을 마지막으로 출근시켰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아는지 엔진소리가 유난히 큽니다. 평생 단 한번도 견인차에 끌려 가본 적 없는 그가 대롱대롱 매달려 견인차에 실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그렇게도 아팠습니다.
적어도 20년은 내 곁에 있어 주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보관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예 이렇게 이별하고 마는 가 봅니다.
이제 그는 주인의 안전을 새로 들어온 차에 맡기고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르망을 대신할 새 차는 197마력의 직열6기통 엔진에 후륜구동차 입니다. 태백산이 처음 운행해 보는 후륜구동차입니다. 수동겸용 5단자동변속기에 타이밍체인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17인치 크롬도금휠이 유난히 반짝입니다.
그미의 강력한 주장으로 3D네비게이션과 전자동선루프를 장착했습니다. 선루프는 별로 쓰는 일이 없지만, 네비게이션은 운전의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통풍시트라나 뭐라나, 시트에서 냉온 바람이 나오게 한 것도 작지만 유용한 배려 같습니다. 일단 제원 상으로는 르망보다 조금 나은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동파킹브레이크를 채택해서 주차브레이크를 아예 없애버렸는데,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해도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주차브레이크가 있었던 르망이 운전하기는 훨씬 편했던 것 같습니다. 자동으로 한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미가 말해서 못이기는체 하고 출고 후에 후방감시카메라를 추가하기는 했지만, 그거 쳐다보다가 더 큰 후진사고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파워핸들이 장착되어 있지만, 수동핸들인 르망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운전하면서도 나나 그미나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운동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그나마 팔 운동할 기회를 빼앗은 것 같습니다.
TV도 나오기는 하지만 목숨을 초개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운전하면서 TV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한달이 다되어 가지만 TV를 켜본 적이 없습니다.
8cd 체인져, 10스피커, 다양한 이퀄라이저 기능을 갖춘 오디오는 꽤 쓸만한 것 같으나, mp3가 안되는 것이 결정적인 흠입니다.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은 mp3가 뭔지도 모를것 같다는 생각이었는지, 설계자의 의도가 이해가 안 됩니다.
출고 후에 시가짹과 USB 메모리를 이용한 무선mp3 플레이어를 추가 장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훌쩍 떠나가 버린 르망을 생각하며 심통이 나서인지 괜시리 이런저런 불만이 나오는 가 봅니다. 20년 무사고 운전자이면서도 임시번호판을 부착한 1주일 동안 “초보운전” 표지를 착실히 달고 다녔어도 아직 내 손 안에 쏙 들어오지 않네요.
이래저래 이 차와 사귀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차가 과연 그 르망만큼 내 맘을 알아주고, 그렇게 오래 동안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르망을 잊으려면 앞으로도 많은 날들이 필요해 보입니다..
르망은 원래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 근방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입니다. 2차대전의 격전지로서도 유명합니다. 태백산이 아래의 글에서 말한 “팬벨트와 여인의 팬티스타킹” 전설에 등장하는 고속도로가 파리에서 르망까지 가는 프랑스 서부고속도로입니다.
몽셀미셀 등 노르망디 지방의 멋진 풍광을 보러 가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달리다가 그런 사고 아닌 사고를 당했던 것이지요. 태백산이 후에 르망을 타게 된 것은 어쩌면 그런 인연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르망은 국내 자동차문화에 일대 혁신을 예고하며, 1986년 6월 27일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5천여 고객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화려하게 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당시 르망을 몰고 시내를 달리노라면 지금 지나가는 메르세데스를 처다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르망은 미국 GM의 독일 내 자회사인 오펠사에에서 생산한 카데트가 원조입니다. 공기저항계수 cd0.32라는, 당시에는 경이적인 수치로 상자갑 모양의 포니문화에 익숙한 국내 운전자들에게는 그 모습에서부터 서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차였습니다. 국산차에서는 공기저항계수가 뭔지도 모를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외제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일반인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르망은 일반인들의 그런 염원을 어느 정도 풀어준 차였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길들여진 차답게 속도가 높아질수록 노면에 착 달라붙어 달리는 탁월한 고속성능은 자동차 매니어들에게는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초기에 생산된 것은 MSTS라는 전자점화식 캬뷰레타방식을 채택했지만, 88년도부터는 TBI라고 불리는 전자제어 연료분사엔진을 적용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의 전자제어 엔진에 비하면 장난감 같지만, 당시는 그런 엔진을 신형엔진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동차 공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연구대상이었습니다. 평생 캬브레터만 만지던 정비사들에게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구요.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원리를 이해하기도 벅찬 그런 신기술이었으니 말입니다.
르망은 86년부터 97년까지 총 103만대가 생산 시판되었습니다. 그중 1대가 태백산에게 인도되고, 나머지 중 절반인 50만대 정도는 수출되어 대우의 수출신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1986년 12월 미국에 처음 수출되면서 대만,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 및 체고 등 동구권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곳곳에 수출되어 기술 한국의 명성을 크게 드높였습니다.
12년의 긴 세월 동안 생산 판매된 밀리언셀러카였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덕에 나중에는 국내 운전자들로부터 다소 외면당하는 슬픈 운명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르망과 같은 명차를 만들고도 그렇게 회사가 비실비실하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르망이 대한민국의 자동차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르망은 대한민국의 자동차기술사에 차지했던 중요한 한 장을 마감하고, 오토조인스에 모습을 남긴 채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지만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즐거운 자동차생활 되세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백산/우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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