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즐거운 택시기사 김기선 본문
< My new life > “금융사 경영하며 ‘큰돈’ 관리했는데, 이젠 ‘잔돈’ 값어치 알게돼” |
저축銀 CEO서 택시기사로…김기선 씨 |
박정경기자 verite@munhwa.com |
한국사회에서 흔히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더 많이 갖고자 한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이름난 위치에 오르고, 주변 사람들의 대접과 부러움을 받는 사회의 ‘갑’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행복지수’를 연구하는 전 세계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크지 않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빠른 성장을 이뤄냈지만 높은 자살률과 이혼율, 학교폭력 등 곳곳에 불행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한국사회가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택시기사 김기선(69) 씨는 더 큰 것을 ‘갖기’보다는 더 많이 ‘버림’으로써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13년째 몸소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월 21일 오후, 금융인들로 북적이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에서 그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미소 짓는 인상 좋은 중년의 모습이었다.
그는 손수 차 문을 열어 택시에 기자를 태우고는 서울 시내를 이곳저곳을 돌며 자신의 즐거운 택시 인생 이야기를 한보따리 풀어놓았다.
사실 김 씨는 누군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는 것보다 누군가가 김 씨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는 일이 익숙했던 사람이다. 한때 그는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였다. 1963년 서울은행에 입사해 중앙투자금융 부장, 고려투자금융 이사, 동아증권 상무를 거쳐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 이사에 올라 세 번을 연임했다.
명지대 상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전경련 최고경영자과정 등을 수료해 넓은 인맥과 학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 임기 1년이 남아 있던 시점에, 손에 쥐고 있던 큰 것들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김 씨의 설명은 이렇다. “영풍상호저축은행 CEO 임기가 1년 남았을 때가 58세였는데, 환갑 기념으로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싶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자는 생각과 더 늦기 전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자는 욕심이 있었다. 개인택시 면허를 받으려면 3년의 법인택시 무사고 운전경력이 필요했고, 58세에 그만두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집에 있는 아내와 아들은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심하게 반대했다.”
주변의 만류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 씨는 2001년 11월 택시기사가 됐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회사에서 받은 차는 폐차 수준의 주행거리를 자랑하는 낡은 차였지만, 그는 차 상태를 따질 만한 겨를이 없었다. 길을 잘 몰라 손님이 안내하는 대로 차를 모는 일이 다반사였다. 술을 먹고 행패 부리는 손님에게 맞기도 했고, 나이 어린 손님에게 싫은 소리도 들었다.
당시 택시는 자동이 아니라 수동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발에 무리가 많이 갔다. 다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택시에 앉으면 견딜 만해 묵묵히 운전을 했다. 법인택시를 모는 3년 동안 그는 단 하루의 결근 없이 운전을 했다. 김 씨는 철저하게 ‘택시기사 김기선’으로 거듭났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확실하다. 택시 운전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나니까 ‘내가 언제 금융사 사장을 했지?’란 생각이 들만큼 옛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노숙자들이 서울역에 많이 나왔었다. 한 목사님이 전도를 하려고 신분을 속이고 노숙자들 곁으로 갔는데 냄새가 그렇게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참아야 한다 생각하고 하루를 버텼더니 다음 날 냄새가 아예 안 나더란다. 밥을 가져와도 배가 고프니까 냄새가 안 나고, 워낙 피곤하니까 머리만 닿아도 잠을 잤단다. 그게 이틀 지나니까 익숙해져 ‘여기가 바로 천당이구나’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은 그렇게 금방 바뀐다. 체념하란 말이 아니라, 관점을 달리하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는 거다.
나는 법인택시를 모는 3년간 택시 일이 주는 재미와 흥분에 빠져 살았다.”
김 씨는 택시 운전을 하면서 소소하지만 참된 행복을 알게 됐다. 금융사 CEO 시절 한 끼에 몇 십만 원 하는 식사를 해도 알 수 없었던 밥맛을 택시기사가 된 후 기사식당에서 6000원을 주고 사먹는 밥에서 맛봤다. 새벽에 일찍 나와 일하기 때문에 점심때가 되면 허기가 지기 마련이다. 기사 식당에서 나오는 따뜻한 밥이야말로 꿀맛이었다. 500원을 더 주고 제육볶음이라도 먹는 날은 김 씨에게 정말 행복한 날이다.
하루 평균 10만 원 정도를 버는 그는 운 좋게 장거리 손님을 만나면 평소보다 2만 원 정도를 더 번다. 그런 날은 귀가하는 길에 아내에게 미리 전화를 한다. 통닭에 맥주를 시켜놓으라고. 각종 합병증과 불면증 등에 시달린다는 주변 친구들과 달리 김 씨는 병치레를 모르고 산다. 하루 종일 일하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 잠자기도 바쁘다. 택시 안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자주 걷는 덕에 나이에 비해 훨씬 건강하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잔돈의 값어치를 알게 됐다. 손님들이 내리면서 거스름돈을 안 받고 100원, 200원을 팁으로 줄 때가 있다. ‘내 서비스에 만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손님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운전하는 데 편한 옷이 최고기 때문에 시장에서 만 원짜리 바지 한 장 사면 그만이다. 더 좋은 옷도 필요하지 않게 됐다. 내 나이에 밥 잘 먹고, 가족들과 가끔 맥주 한 잔씩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아느냐. 금융권에 있을 때는 좋은 차를 타면서도 바빠서 거래처밖에 다니지 않았다. 택시를 운전해온 12년 동안 서울 시내 안 가본 곳이 없다. 택시에 앉아 봄이면 벚꽃 구경, 가을이면 단풍 구경 할 수 있는 행복, 그게 삶의 기쁨이다.”
김 씨는 인생 2막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덧셈’이 아닌 ‘뺄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타인의 시선’ ‘나이’ ‘체면’ 이 3가지를 버렸다. 그와 같이 택시 운전을 시작했던 3명의 친구는 모두 중간에 택시 일을 그만뒀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친구도 있었고,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운전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친구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은퇴 이후의 자신을 ‘폐기물’로 생각하지 않고 ‘재활용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직업을 가져야 하고, 그 직업은 자신이 오래,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내 건강비법은 나이 들수록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또한 나이든 체, 가진 체 하지 말고 체면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린다. 지금 사회는 퇴직은 빠르고 수명은 길어지니까 퇴직 후 어떻게 살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경제적 노후 대책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고살지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나처럼 즐거운 택시기사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즐거운 택시 인생, 즐거운 택시기사 김기선 씨는 오늘도 어딘가를 쉼 없이 달리고 있다. 박정경 기자 verite@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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