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식품산업의 개척자,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 본문
어릴적, 어둡고, 춥고, 배고팠던 시절
정말 먹고싶었던 것이 바로 노란봉지의 삼양라면이었습니다.
명절이면 용돈을 모아뒀다가 라면을 우선 사먹었고, 소매가격이 20원할 때 시장에 가면 100원에 6개를 살수 있었고, 그걸 사다가 형, 동생들과 함께 맛있게 끓여먹곤 했었죠.
갑자기 우지파동이 터지고 한동안 시끄럽더니만 라면시장은 어느덧 농심이 절대강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옛날 삼양라면에 대한 향수때문에 굳이 농심이나 다른 라면을 사지않고 삼양라면을 사먹었습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촛불시위가 한창일때 조중동에 광고중단하라는 네티즌에게 농심이 정면으로 용감히 맞선 것 까지야 좋았는데, 그만 화학조미료 MSG를 왕창 넣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버리고 말았군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잘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좌초해버린 삼양에 비하면 농심은 그야말로 운이 좋은 편이죠.
물론 우지파동을 농심이 사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직접적인 혜택을 본 기업이 농심이니 만큼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 돼야 마땅한데 그런 기미는 없어 보이고 오히려 삼양 전중윤 회장이 어려운 일에 앞장서더군요.
앞으로 저는 더욱더 열심히 농심라면 안먹을랍니다.
삼양식품, 그리고 전중윤 회장님 힘내세요.
저는 삼양식품이 억울하게 누명쓴 과거를 잘 알고 있답니다.
‘부패권력이 기업 괴롭혀선 안됩니다’
대담 = 양승득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50년간 기업경영을 하면서 15년 동안 온갖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다 부패한 권력에 의한 관재(官災)였죠. 다시는 이런 부패권력이 기업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국내 식품산업의 개척자이자 삼양라면으로 유명한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전회장의 회고대로 삼양식품의 지난 1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89년에 터진 우지(牛脂)사건은 생각조차하기 싫은 끔찍한 악몽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97년 8월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아냈지만 불과 6개월 뒤 외환위기 속에서 화의에 들어가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올 3월23일 마침내 화의에서 벗어나며 경영정상화를 이루고 재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갖은 난관을 이겨낸 강인한 성품답게전회장은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과거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을 것 같고, 또 한풀이하던 사람도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경제에 대한 견문도 쌓이면서 앞으로는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에요. 중국과 인도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 들어가서 부지런하게 잘 쫓아다니고 있잖아요. 한국경제는 더 좋아질 겁니다.”
우지사건 이전까지 전회장은 실패를 모르던 기업가였다. 해방 전 체신부에서 근무하다가 해방 후에 개인사업을 하던 중 6ㆍ25가 끝나고 동방생명을 설립해 성공을 거뒀다.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보면서 고심하던 전회장은 마침 일본에서 라면이 개발된 것을 보고 샘플을 갖고 들어와 영세민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공장을 만들어야겠다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설득했다.
1개 라인시설비로 6만달러가 필요했지만 당시 한국은행 보유외화는 겨우 10만달러가 넘는 수준. 결국 최고위층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들어온 10만달러 차관 가운데 절반을 불하받았다.
“일본 명성식품 사장을 소개받아 만난자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청했더니 ‘내일 보자’고만 합디다.
다음날 ‘6ㆍ25로 한국이 피 흘리고 일본은 돈을 벌었다’며 ‘민간 차원에서 돕겠다’고 말을 하더군요. 경제성이 있으려면 2개 라인이 필요하다면서 자기네 설비업자에게 소개를 해 2개 라인을 2만7,000달러에 지을 수 있게 해줬지요.
사실 그때는 한국에서 달러만 있으면 10배의 차익을 남길 수 있었지만 남은 돈은 바로 정부에 반납했죠.”
전회장은 당시 25일간 공장으로 출근해 그림을 그리고 시간을 재가며 공정을 익혔는데 명성식품측에서 가장 중요한 배합비율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몸을 태웠다고 했다.
결국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앞에서 배합비율이 담긴 봉투를 전달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신기술이었던 라면 제조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조치였던 것.
“처음에는 국민들이 라면이 뭔지를 모르니 팔리지를 않더군요. 서울역과 극장에서 제품을 나눠주고 부인단체를 대상으로 수십만개를 뿌렸어요. 10개월쯤 지나니까 팔리기 시작하더니 3년 만에 적자를 모두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삼양라면 생산량이 충청도의 쌀생산량에 맞먹는 기여를 했지요.” 89년에 매출 5,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거침없는 성장을 계속했지만 바로 우지사건을 맞았다.
97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손해는 되돌릴길이 없었다. 그는 당시 사건이 부패한 권력의 소행이라며 단언한다.
“당시 검찰이 우리를 비롯해 5개 회사만 문제를 삼고 다른 곳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보사부 장관이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도 검찰은 들은 척도 안했죠. 1심 판결만 5년이 걸렸어요.
검찰 눈치 보느라 판사가 판결을 미룬 거죠. 결국그러는 동안에 회사는 수천억원의 피해를 입었고, 죄 없는 직원 1,000여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당시 여권 실세에게 접촉을 했더니 최고위층과 만남을 주선해주겠다며 50억원을준비하라는 말을 듣곤 “돈도 돈이지만 잘못이 있다고 인정을 할 수는 없다" 며 거절했던 사연도 털어놓았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살 수가 없다는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정의는 살아남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버텼다고 한다.
고정고객들의 꾸준한 구매와 신제품 쌀라면의 호조로 매출이 다시 늘기 시작했지만 회사사정이 온전해지기 전에 다시 IMF 사태를 맞아 다시 눈물겨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IMF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전회장은 할말이 많다.
“제일은행이나 진로 처리에서 보듯이 외국자본이 들어와 몇 조를 벌어가도 세금 한푼을 안내는데, 우리는 수익도 못내는 상황에서도 계열사에 자금 줬다는이유로 인정과세 137억원을 부과합디다.
결국 외국자본이 들어와 단물만 빨아먹고 가도록 정부가 외국인 편만 들어준 거죠.”전회장은 일본의 사례를 거론하며 우리가 IMF 사태 때 얼마나 외국인에게 놀아났는지를 설명했다.
당시 일본은 정부가 펀드를 조성해 기업에 연리 1%에, 20년상환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돈을 빌려줘 금융기관에 대한 부채를 갚도록 했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는 것.
반면에 우리는 금융기관에 엄청난 공적자금을 쏟아붓고 기업은 외면하는 바람에 국가적인 손해가 더 컸다는것이다.
“어디 가서 호소할 데가 없었어요. 섬에 버려진 고아 같은 심정이었죠. 국내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 회수해서 자기 앞만 가리는 데 급급했지 오랜 거래처인기업을 보호할 생각은 안합디다.”
IMF 사태 당시 삼양식품의 회사 가치가 7,000억~8,000억원 정도였는데 이를 외국자본이 500억원에 팔라는 이야기를 듣곤 “파산을 할망정 외국인한테는 안 준다”는 각오로 버텼다.
전회장은 국내 금융기관에 주인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삼양식품의 경우 그나마 주인의식이 살아 있는 신한은행의 도움을 받은 것이 행운이었다.
“당시 신한은행에서 먼저 삼양식품은 살아날 여지가 있으니 협력해 해보자고손을 내밀었죠. 부채에 대한 금리를 낮춰주고, 상환을 연기해줬을 뿐만 아니라다른 금융기관도 신한은행이 직접 나서서 설득을 해줬습니다.
그 도움을 받아서 비업무용 토지와 부산ㆍ원주ㆍ이리 공장 등을 처분해 2년 동안 4,000억원을갚을 수 있었습니다. 삼양식품의 경우가 은행이 기업과 협력해서 회생시킨 최초의 사례입니다.”
전회장은 독재권력의 폐해에는 몸서리를 친다. 한때 삼양식품에 조총련 자본이들어왔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뽀빠이’ 도안이 북한의 남침을 그린것이라는 모함까지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재벌과 권력의 관계도 당연히 바뀌어야 하지만 재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삼성이나 현대나 한때는 권력의 힘을 빌려서 성장을 했지만, 어쨌든 재벌이존재하니까 나라가 존재한 것도 사실 아닙니까. 재벌을 무리하게 해체해서는 안됩니다.”
유럽의 경우 귀족사회가 해체되면서 이들이 기업활동에 나서면서 가족회사를 꾸려가는 전통이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들의 경우 말 그대로 ‘전쟁이 나면 귀족 아들이 제일 먼저 전쟁에 달려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충실한 귀족정신이 살아 있다는 점이 큰 차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결코 부정한 일이나 국가ㆍ사회에 해로운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남의 것을 빼앗아 20~30%의 성장을 하는것이 아니라 5~10% 성장에 만족하는 자세가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한편 투기자본이 들어와서 우리 기업을 넘볼 수 있다는 위험도 지적했다. 이미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지분을 외국인이 절반 이상 차지한 상황에서 언젠가경영권도 넘보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재벌도 금융기관을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남미나 동남아 같은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주인이 있는 금융기관이 생겨서 우리 기업을 보호해야 합니다.
외국자본은 세금도 안 내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는데 삼성은 몇 조씩 갖고 있어도 마음대로 투자를 할 수 없으니, 우리 관료들은 외국자본을 위한 존재인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재벌집중을 걱정하는 데 외국인에게 주느니 재벌에 주는 것이 낫지 않으냐는 반문이다.
현 정부의 정책과 관련해서는 “분배의 성격이 강하다”면서도 “성장하면서 분배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빈곤층이 많아지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러시아나 중국이 공산화된 것도 빈부격차 때문이었다는 생각이다. “미국식자본주의는 한국에 정착될 수도 없고, 또 정착돼서도 안된다”면서 소득계층간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1919년생이라는 고령에도 여전히 건강하고 힘찬 모습을 보이는 전회장은 화의에서 벗어나면서 제4의 창업을 선언했다.
1961년 창업에 이어 우지사건 극복과 IMF 사태 극복을 제2ㆍ제3의 창업으로 보고, 이제는 경영정상화 위에서 재도약을이루겠다는 포부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미래를 향한 도전이 있을뿐이다.
약력 : 1919년생. 38년 선린상고 졸업. 88년 강원대 명예농학박사. 57년 동방생명보험 부사장. 61년 제일생명보험 사장. 61년 삼양식품 대표이사 회장(현). 69∼76년 한국식품공업협회장. 72∼98년 삼양축산 회장. 75∼80년 한국기업목장협회 회장. 75∼82년 삼양유통 회장. 78년 삼양유지사료 회장. 79∼80년 명덕문화재단 이사장. 80∼82년 배화학원 이사장
정리=조영행 기자/사진=서범세 기자 (한경비즈니스, 200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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