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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먹거리

수원 24시 해장국(김학민)

희망연속 2008. 5. 21. 19:17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광교산에서 부르는 막걸리 찬가






물 마시지 말고 광교산을 오르라, 내려오자마자 ‘24시 해장국’ 막걸리를 들이켜라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그러나 특별히 청소년 시절부터 등산이 취미인 것은 아니었고, 1970년대 중반 유신독재 시절 대학에서 제적된 뒤 반백수건달 생활을 하면서 자연히 남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

 

지금껏 물리지 않고 유일한 취미로 남아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땀흘려 산에 올라 정상에 앉아 호연지기를 맛보는 등산 ‘본령의 맛’ 외에 다른 무엇이 나를 등산에 매혹되게 했으니, 하나는 좋은 선후배·친구들과의 어울림이며, 다른 하나는 하산 뒤 뒤풀이에 대한 기대다.

 

전문 산악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심하고 어설픈 ‘유흥 등산객’의 모습이겠으나, 어쩌랴, 나는 이게 더 좋은 것을.

 

내가 등산을 함께하는 팀은 시인 신경림 선생, 소설가 현기영 선생 등이 멤버인 20여년 된 무명산악회, 그리고 고교동창 이우섭이 대장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배재산악회가 있다.

 

몇년 전 경기 용인 수지로 이사온 뒤로는 홍일선·용환신·윤한택 시인, 음악가 조재식, 사진작가 박희주씨 등 수원·용인 부근에 사는 문화예술인들과 주로 광교산 등산을 즐긴다.

 

무명산악회는 나의 스승인 고 성내운 선생(전 광주대 총장)이 회장으로 계셨고 회원들도 나보다 연상의 어른들이라 나는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 하는 처지에서 발언권이 아주 미약했다.


 배재산악회는 모두 동창들이라 특별히 내 말만이 먹혀들지 않았는데, 광교산을 등반하는 우공이산 산악회는 회원들이 대부분 나보다 어려 여기서는 제법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광교산은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는 수원의 주산으로, 왕건이 견휜을 격파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광교산 자락에 머물렀는데, 산에서 광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왕건이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이 산에70여개의 절을 세워 고려 왕조의 무궁 안녕을 기원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휴일이면 수많은 수원시민·용인시민들이 광교산을 등산하는데, 완만하지만 잘 자란 수목 사이로 예쁘게 난 오솔길을 등산하는 맛이란 참으로 상쾌하다.


또 광교산이 있는 수지라는 지명에 걸맞게 좋은 약수터들이 널려 있어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나는 우공이산 산악회 회원들과 등산할 때는 약간 독재를 한다. 따뜻한 봄이건 서늘한 가을이건, 찌는 듯한 한여름이건 차가운 겨울이건 가능하면 산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대비한 극기훈련이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면 사하라 사막 횡단에 대비한 체력다지기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산 뒤의 뒤풀이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온 다음 대개 수원 장안문 부근에 있는 한 허름한 막걸릿집으로 가는데, 이 집의 막걸리 맛이 끝내준다.

 

이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리겠지만, 산에서 갈증을 참고 참게 해 물 한 모금 못 마시게 한 것은 이 집에서의 막걸리 첫잔의 꿀맛을 보게 하려는 나의 ‘애정’ 때문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첫잔의 꿀맛에 감탄하지만, 결국 몇잔을 마셨는지 셀 수 없을 지경까지 ‘꿀맛 예찬’은 계속된다.

 

이 집은 막일꾼·고물장수 등 수원시내 ‘민중’들이 즐겨찾는다. 상호조차 장삼이사식으로 그냥 ‘24시 해장국’(031-254-8064)이다. 주인 아주머니 김재옥(40)씨는 부근에서 비슷한 왕대폿집을 운영하는 오빠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아 몇년 전에 이 집을 열었다. 일취월장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오빠네 집보다 손님이 더 많고 안주도 더 맛깔스럽다.

 

안주 차림도 여러 가지 있지만, 한번 들르걸랑 복잡하지 않게 주인 아주머니께 그냥 불쑥 말하라. 그리하면 마이더스의 솜씨가 술꾼, 당신을 행복하게 하리라.

 

“아주머니, 막걸리 한되 하고, 있는 거 중에서 아무거나 해주세요!”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한겨레21, 2003. 1.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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