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뉴욕 옐로캡 한국인 기사 황길재씨 본문

서울 택시세상

뉴욕 옐로캡 한국인 기사 황길재씨

희망연속 2015. 6. 4. 16:46




영화연출, 연극배우, IT 전문가, 뇌과학 강사, 방송기자 이색 경력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세계의 수도' 뉴욕의 랜드마크는 뭘까.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센터? 뉴욕엔 움직이는 랜드마크도 있다. 다름 아닌 맨해튼의 노란 택시, 옐로 캡(Yellow Cab)이다. 이 옐로 캡에 드물지만 한국인 기사가 있다.

"사람 일은 모를 일이에요. 내가 미국에 살게 될 것도, 언론사 기자를 하게 될 것도, 택시 운전을 하게 될 것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 옐로 캡(Yellow Cab)의 보기드문 한국인 기사다. 영화연출과 연극배우, IT전문가, 뇌과학강사, 방송기자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면허과정을 거쳐 옐로캡 기사로 변신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50대가 되면 그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화물트레일러를 몰고 북미대륙을 누비는 일을 하겠다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2015.04.02. <사진=황길재씨 제공>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 옐로 캡(Yellow Cab)의 보기드문 한국인 기사다. 영화연출과 연극배우, IT전문가, 뇌과학강사, 방송기자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면허과정을 거쳐 옐로캡 기사로 변신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50대가 되면 그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화물트레일러를 몰고 북미대륙을 누비는 일을 하겠다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2015.04.02. <사진=황길재씨 제공>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 옐로 캡(Yellow Cab)의 보기드문 한국인 기사다. 영화연출과 연극배우, IT전문가, 뇌과학강사, 방송기자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면허과정을 거쳐 옐로캡 기사로 변신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50대가 되면 그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화물트레일러를 몰고 북미대륙을 누비는 일을 하겠다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영화계를 떠난후 1년여 인도여행중 모습. 2015.04.02. <사진=황길재씨 제공>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 옐로 캡(Yellow Cab)의 보기드문 한국인 기사다. 영화연출과 연극배우, IT전문가, 뇌과학강사, 방송기자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면허과정을 거쳐 옐로캡 기사로 변신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50대가 되면 그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화물트레일러를 몰고 북미대륙을 누비는 일을 하겠다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미국에 오기전 정신세계원에서 뇌과학강사로 활동할 당시 모습. 2015.04.02. <사진=황길재씨 제공>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 옐로 캡(Yellow Cab)의 보기드문 한국인 기사다. 영화연출과 연극배우, IT전문가, 뇌과학강사, 방송기자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면허과정을 거쳐 옐로캡 기사로 변신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50대가 되면 그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화물트레일러를 몰고 북미대륙을 누비는 일을 하겠다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영화판을 떠난후 1년간의 인도여행중 모습. 2015.04.02. <사진=황길재씨 제공> robin@newsis.com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씨가 미국에 온 것은 2007년이었다. 한 벤처회사에서 음악 관련 IT 전문가로 일하다 2010년 뉴욕의 한인 라디오방송에 입사해 2년여 간 기자로 뛰었다. 기자 시절엔 마침 뉴욕 양키스에서 뛰고 있던 박찬호의 전담기자로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박찬호가 피츠버그로 팀을 옮긴 후에는 IT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자 일도 천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영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자의반 타의반 사직한 그에게 전혀 생각지 못한 기회가 주어졌다. 옐로캡 기사였다.

개척교회에서 만난 한인의 부탁으로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해주다 옐로캡 기사 제안을 받은 것이다. 눈 수술로 일을 쉬고 있었고 한 명의 기사가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보통의 택시기사보다는 월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라이센스를 받고 마침내 옐로캡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물 흐르듯 살자'는 게 인생 철학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황길재씨의 삶은 특별하다. 어린 시절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rh 영화만 파고들었다.

"서른 정도엔 칸 영화제 대상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현실은 달랐지요. 무엇보다 저는 천재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불운했다. 졸업 후 곽지균 감독 연출부에서도 일하는 등 충무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영화가 엎어졌다. 결국 영화판을 떠난 그는 산행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중국 티베트, 네팔, 인도, 파키스탄의 고산지대 순례를 1년여 계속했다.

여행 후 정신세계원에 입사한 그는 동서고금의 정신세계 지식과 수련법을 익혔고 종국엔 뇌과학 강의까지 맡았다. 이곳을 통한 인연으로 미국에서 다큐 영화를 만들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건너간 미국에서 IT 전문가와 방송 기자를 거쳐 옐로캡의 세계까지 섭렵하게 된 것이다.

5만여 명에 달하는 옐로캡 기사 중 한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 택시 기사는 뉴욕시가 관장하는 옐로캡이 아니라 한인 회사가 운영하는 유사 택시를 몰기 때문이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한국인 옐로캡 기사는 20∼30명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한국인 옐로캡 기사를 만나는 한국인 승객은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하기도 한다.

◆ 첫날부터 실수 사고 연발

황길재씨는 2013년 7월17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제헌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머리털 나고 처음 옐로캡 영업을 시작한 날"이란다. 첫 손님은 JFK 공항에서 아침 6시에 태운 60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 가자는 손님을 태우고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했다. 맨해튼까지는 52달러 정액요금을 찍어야 하는데 그것을 잊고 미터기로 달린 것이다.


자주 택시를 이용한 듯 이 손님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닫고 "죄송하다 미터요금이 얼마가 나오든 정액요금만 받겠다. 사실은 내가 오늘 처음 택시 영업을 하고 당신이 내 인생의 첫 손님이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이 고객은 "그게 정말이냐?"고 놀라워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톨비까지 포함해 58달러가 요금이었지만 20달러도 넘는 팁까지 주었다. 첫 손님을 기억하기 위해 촬영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한 맘씨 좋은 신사였다.

두 번째 손님도 실수 연발이었다. 맨해튼 남단에서 20대 초반의 중국계 여성이 탔는데 168가 소아병원이 목적지였다. GPS에 주소를 찍으려고 하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달리던 중 갑자기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운전대를 꺾었다가 뒷차와 부딪치고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어요. 첫날 두 번째 운행에 사고를 내다니. 최악이었지요."

천만다행으로 다친 사람도 없었고 뒷차의 범퍼만 약간 손상된 정도였다. 경찰을 부르지 않고 면허증과 보험증을 교환하고 수습할 수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사고가 컸더라면 그날로 택시 운전을 그만 뒀을거에요. 첫날부터 제대로 액땜을 한 셈이죠."

뉴욕의 택시 하면 옐로캡을 떠올리지만 사실 택시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다. 커뮤니티 카로 불리는 리버리 택시가 약 2만5000대가 있다. 리버리가 옐로캡과 다른 것은 호객 행위를 못하고 콜택시 기능만 맡는다는 것이다.

주로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블랙카 택시도 1만여 대가 있고 초록색이어서 일명 '그린 캡'인 1만2000대의 보로택시도 2012년 도입됐다. 보로택시는 맨해튼을 제외한 4개 보로(퀸즈, 브롱스,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와 맨해튼 서쪽은 110가 이상, 동쪽은 96가 이상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

이밖에 럭셔리 리무진이 약 7000여대, 장애인용 택시 패러트랜짓이 약 2000대, 커뮤터 밴 500여대도 넓은 의미의 택시들이다.

최근엔 한국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은 우버 택시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치열한 경쟁 환경이 조성되면서 그간 옐로캡에 주어진 특혜(?)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영업하는 택시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옐로캡이 쇠락의 길을 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옐로캡은 단순히 택시가 아니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이기때문이다.

2년이 되어 가는 지금 그는 어느새 베테랑 옐로캡 기사가 되어 있었다. 맨해튼 구석구석을 눈 감고도 갈 정도고 허둥대는 일도 없다. 하지만 초보 시절엔 손님들로부터 최고의 운전이라는 칭찬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요즘은 그런 소리를 못 듣는다. "어느새 타성에 젖은 옐로캡 기사가 돼 버린 것 같아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죠."

준수한 외모의 그는 미국에서 두 차례 연극에 출연도 했다. 2008년엔 '이수일과 심순애'의 주인공을 맡았고 2012년엔 한인사회 최초의 창작 뮤지컬로 화제를 모은 '자화상(극단 MAT)'에서 연기와 노래 실력도 뽐냈다.

옐로캡을 시작한 뒤로 이 같은 '외도'를 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다른 기사 두 명과 3교대로 일하는 그는 수요일과 금요일 쉴 수 있고 수입도 미국 와서 가진 직업 중 가장 많다. 하지만 50대가 되면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서다. 미국에 온 뒤로 그는 언젠가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트레일러를 타고 미 대륙을 누비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주일 혹은 열흘 간 쉬지 않고 대륙을 종횡으로 달리는 트레일러 기사들. 사막을 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길을 목숨을 걸고 넘어야 하는 직업이다.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이 성인이 될 무렵, 거대한 화물 트럭을 몰고 북미 대륙을 누비는 트레일러 기사 필 황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robin@newsis.com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