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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쟁을 말하는가? (경향신문, 김민아)

희망연속 2010. 5. 26. 15:27

[김민아 칼럼]누가 전쟁을 말하는가


이달 초 영국 왕실은 왕위계승서열 3위인 해리 왕자가 공격용 헬리콥터 아파치의 조종사 훈련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육군 장교인 해리 왕자는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
 
소속 부대가 탈레반의 타깃이 될 것이라는 우려로 10주 만에 귀국했지만, 그는 지금도 아프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영국 왕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전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주의 몸으로 군용 트럭을 몰았고, 여왕의 아들 앤드루 왕자는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미국 지도층도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의 아들, 존 매케인·세라 페일린 전 공화당 정·부통령 후보의 아들이 모두 이라크에서 복무했거나 복무 중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 이후 군 통수권자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 지난 24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장소는 청와대가 아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이었다. 앞서 4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선 평상복 차림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 다음날인 21일에는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그러나 국가안보 책임자들의 단호함을 보여주기에는 면면이 미덥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8명 중 절반인 4명이 군 면제였다.
 
이 대통령은 기관지 확장증, 정운찬 총리는 고령, 원세훈 국정원장은 하악 관절염,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은 근시고도양안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군에 다녀와야만 안보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스핀 닥터(정치홍보 전문가)’들의 면밀한 ‘연출’로도 이들의 전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NSC 참석 8명중 절반이 군면제

요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주장하며 ‘전쟁 불사론’을 외치는 극우파들이 있다. 정부도 이를 틈타 국민의 위기의식을 자극하며 6·2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하고 있다. 나는 전쟁 불사론자들의 가족 가운데 군 복무 중인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
 
혹여 동생이나 아들, 사위를 군대에 보냈다면 응징이니 보복이니 전쟁이니 하는 말을 그리 쉽게 꺼내지 못할 테다. 최소한 안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군인 가족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예비군 긴급 징집’이라는 허위 문자메시지에 놀란 사람들의 문의전화가 국방부에 쇄도했다는 ‘소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는 전쟁을 각오할 때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궤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죽거나 내 가족이 죽은 다음에 국가가 승전고를 울린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1·2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일한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 ‘전쟁은 무서운 것’이며 ‘패자는 물론 승자도 상처를 입는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준 점일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계속되고, 많은 나라가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한 군사력의 불균형 등을 이유로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도 있다. 이 또한 위험한 생각이다. 역사상 많은 전쟁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에 대한 ‘합리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만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길이다.

전쟁 원하면 아들부터 전장에

이성을 잃은 호전적 세력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전쟁을 원한다면 당신의 동생, 아들, 사위부터 전장에 내보내라. 아니, 당신도 방아쇠 당길 기운만 남아있다면 전장에 뛰어들어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전쟁의 ‘ㅈ’도 입에 담지 말라. 실제 전쟁을 할 능력도, 의지도, 배짱도 없지 않은가.

전쟁이라는 이슈에서 주변부로 밀리기 쉬운 여성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현대전은 전방과 후방,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한 총력전이다. 민간인,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피해가 크다. 그러니 이웃의 목숨을 담보로 사익을 취하려는 무리들을 ‘응징’하라.
 
그들이 조성하는 비합리적 공포 분위기에 휘둘리는 대신 “나는 전쟁이 싫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라. “아는 건 쥐뿔도 없는 여자”(한나라당 지방선거 홍보 동영상)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면.

<김민아 | 특집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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