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정년퇴직 교장선생님 개인택시 본문
택시기사로 제 2의 삶 시작한 한유석씨
"퇴직한 동료들과 함께 개인택시회사 차려 일하며 불우한 이웃 돕고 싶어"
정년을 잊은 사람이 있다.
전라북도 전주 거북기업에서 일하는 65세의 택시 운전기사 한유석씨. 그는 43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 온 ‘교장’ 출신 운전기사다.
3D 업종으로 불리며 젊은이들조차 꺼리는 택시운전을 제2의 삶으로 택한 그는 술 취한 승객에게는 따끔한 교장선생님, 몸이 불편한 노약자나 장애인에게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된다.
한유석씨가 들려주는 ‘택시 속 세상이야기’.
“정년퇴임 했더니 주변에서 자꾸 쉬라고만 해. 그런데 한 일주일 쉬니까 죽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예순셋의 나이에 택시 운전기사를 선택한 한유석씨(65).
193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99년 9월 전북 내장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의 학교생활을 마무리했고, 딱 17일이 지난 후 교편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부인 최정숙씨(64)씨와 여행을 다녀온 열흘과 집에서 무위도식한 7일이 그가 일을 하지 않고 쉬었던 전부다.
“여기저기가 막 아파. 괜히 우울해지고. 마누라는 교회 봉사활동 하느라 바쁘지. 혼자 집에서 뭐해.”
만능체육인으로 통하던 젊은 시절, 그는 ‘공 강아지’라 불릴 만큼 축구, 배구 등을 좋아했고 실력 역시 뛰어났다. 한창때는 전북 축구대표선수로 뛰었고, 나이 들어서는 배구 A급 심판으로 활약했다. 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활동파였다.
그런 그를 집안에 가두어 두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상대로 한유석씨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관광여행이나 노인정이 아닌 또 다른 무엇. 하지만 아무도 그가 택시 운전기사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
“다들 펄쩍 뛰었지. 큰아들이고 마누라고 하나같이 반대했어. 함께 정년 퇴임한 동료들은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고 핀잔도 하고, 걱정도 하고.”
99년 10월, 한씨가 17일간의 휴식 끝에 내린 결정에 대해 모두들 염려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한씨는 고집대로 일을 추진했고 결국 택시 운전기사가 됐다. 평소 친분이 있던 한 택시회사의 사장에게 부탁을 하니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냐”고 물었다. “줄 섰어. 자기도 택시 기사가 될 수 없냐고 다들 난리야. 내가 하는 것 보니까 이제 부러운 거지. 난 더 젊어졌어. 그때 함께 퇴임한 친구들보다 10년은 더 젊게 살 걸?” 한씨의 표정은 의기양양하다.
‘전북 30바 2528호 크레도스.’ 그가 몰고 있는 택시다. 택시 운전 경력은 고작 2년 남짓이지만 한씨와 자동차와의 인연은 꽤 깊다. 자동차가 귀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그의 외가댁이 자동차 사업을 했기 때문에 흔한 게 자동차였다.
장난 삼아 운전석에도 앉아보고 핸들을 돌리며 제법 ‘폼’도 잡았다. 어깨너머로 자동차 수리도 배웠다. 군 복무시절에는 평소 쌓아놓은 실력 덕에 운전병으로 발탁됐다. 당시 운전면허 있는 군인이 드물었기 때문에 한씨의 실력은 단연 돋보였다. 상관들의 칭찬도 한몸에 받았고 ‘편한’ 군 생활도 보장됐다.
“운전 때문에 덕을 많이 봤어. 군대에서나 지금이나 그래. 내가 운전을 못했으면 매일 노인정에나 가고 있었겠지. 이렇게 젊은 사람들하고 인터뷰하겠어?”
43년 일하고 17일 휴식, 다시 일터로
한씨는 ‘교장선생님 운전사’라는 입소문이 퍼져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자랑이다. 40년 넘는 교직생활에서 수없이 많이 배출했던 제자들, 학부모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까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주시내에 가득하다. 그냥 거리를 지나다가도 누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아는 체를 한다.
그래서 하루에 한두번 정도는 꼭 안면이 있는 사람을 태우게 된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어느덧 중견 기업가가 되어 그의 손님이 되기도 하고, 콧물도 잘 못 닦던 그 작은 꼬마들 머리에도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가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서로 잘 몰라봐. 운전면허증 한번 쳐다보고 내 얼굴 한번 쳐다보고, 그러다 내릴 때 돼서야 ‘저기요’ 하고 묻지. 즐거워. 그렇게라도 만나면 참 반갑고 좋아.”
그래서 한씨는 나날이 회춘하는 것 같다며 택시운전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택시는 사랑을 싣고’라면 우스갯소리까지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이런 즐거움이 있는 대신 어려움도 있다. 손님이 급할 때나 도로가 많이 막힐 때 가끔은 교통위반을 하고 싶어도 남의 이목이 무서워 딴 생각을 못한다고.
그 덕에 사납금도 못 채운 날이 많다며 ‘허허’ 웃는다. 제자들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그의 지난 교단생활이 궁금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호랑이 선생님이었어. 애들이 복도에서 내 모습만 보면 순식간에 교실 안으로 사라져버렸으니까.”
평교사 시절, 학생들에게는 무섭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학부모들이나 학교 관리자들에겐 인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교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반이 같은 학년에서 2등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학급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는 우수학생과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한팀으로 묶어 하루종일 함께 생활하게 했다. 그들은 미리 세워놓은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칭찬도 벌도 같이 받았다.
이런 교육방법은 전반적으로 학생들의 학력을 신장시켰고, 그는 매년 교원 인사철만 되면 유명세를 치렀다.
하지만 막상 43년의 교단생활을 접고 교단을 떠나보니 아쉬움 점이 더 많다.
“너무 성적 올리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아. 그보다 중요한 것이 인성교육인데 말이야. 일본에서는 학부모들이 그런다고 해. ‘오늘 하루도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남에게 해로운 일은 하지 말아라’ 하고. 우리는 그런 가르침이 부족했어.”
그는 “요즘 아이들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런 교육이아닌가”하며 “후배 교사들이 이 점을 잘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렇듯 한씨가 ‘교장출신’ 운전사라고 해도, 혹은 사장 친구라 해도 남다른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루 2교대 근무원칙은 그에게도 정확히 적용된다. 오후 2시∼새벽 2시까지인 오후반, 아침 6시30분∼오후 1시까지인 오전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오전반은 7만1천원, 오후반은 7만2천원, 사납금도 일체 깎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깨가 더 무겁다고 한다. 매사에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씨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다. 자동차 정비와 세차도 직접 하며 부지런히 손님맞이를 한다. 승객들에게 틀어줄 테이프도 정리한다. 그는 교향곡부터 행진곡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녹음해갖고 다닌다. 아침에는 힘찬 하루를 보내라고 행진곡을, 밤에는 하루를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교향곡을 틀어준다.
이처럼 세심한 배려에 주변 사람들은 ‘역시 교장선생님답다’고 감탄한다. 늘 불평만 하던 후배 기사들도 한씨의 태도에 얼굴을 붉힌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한씨의 학교 제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며 입을 모았다.
한씨는 오후반을 더 선호한다. 오후반이 돈도 더 잘 벌리고 교통체증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도 많은데 오후 2시부터 새벽까지 근무하기가 힘들지는 않을까 싶었다.
기자의 그런 마음을 어느새 읽었는지 “건강 염려는 없어. 쉬는 날마다 등산하지, 항상 소식하고 짠 음식 싫어하지, 나처럼 건강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라고 먼저 선수를 친다. 이처럼 그는 주로 오후반을 뛰는 까닭에 ‘택시 속 요지경 세상’도 많이 경험했다.
택시에서 본 ‘세상 사는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 계획
“하루는 목수 일을 한다는 한 젊은이가 탔어. 고기를 사들고. 처가에 가는 길이라고 하대. 그런데 얼굴이 말이 아니야.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도대체 왜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있냐고.”
그 목수의 아내는 2주전에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만 놔두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결정적인 이유는 성미 급한 남편의 손찌검 때문이었다. 폭력의 발단은 목수가 어렵게 모아놓은 목돈을 아내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사람 모두 딱했다고 한다. 사람을 잘 믿는 아내를 탓할 수도 없었지만 아내에 대한 남편의 배신감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씨는 아내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무리 아내가 큰 실수를 했더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폭력은 습관이잖아. 처음이 어렵지 나중은 쉬워. 마음 같아서야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일부러 안했어. ‘나 같으면 자네 같은 사위는 없는 셈 치겠다’고 마구 호통쳤지.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죄하라고.”
또 한번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젊은이가 대뜸 ‘홍등가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손가락을 보니까 결혼반지를 꼈어. 그래도 나이 든 사람 앞에서 어색한지 계속 창밖만 보더라고. 그 순간 설득하면 통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지.”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서울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는 출장차 전주에 왔다 잠시 ‘한눈’을 팔려고 했다는 것. 40년 관록의 교장선생님은 바로 ‘훈화말씀’에 들어갔다. ‘젊은이, 하룻밤의 유혹을 참지 못하면 되겠나’로 시작해서 ‘나중에 아내 얼굴을 어찌 보려고 그러나’로 끝나자마자 그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노모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이렇게 ‘바른 생활’로 돌려보낸 승객만 해도 여럿 된다는 그는 내년에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묶어 ‘택시 속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씨는 택시운전 3년째가 되는 내년에는 개인택시 면허를 갖는다. 3년 무사고 운전자에게 주어지는 특혜다. 그래서 2002년을 맞는 한씨의 꿈은 남다르다. 40년 교단생활에 큰돈은 못 모았어도 택시 한대 살 돈은 된다며 개인택시 면허가 발급되면 각 분야에서 퇴임한 동료들과 함께 개인택시회사를 차릴 생각이다.
즉 일하고 싶은 노인들이 모여 일할 수 있는 ‘노인자활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게 마지막 내 역할인 것 같아. 영업용 택시로는 행동에 제약이 많잖아. 장애인이나 노인이라고, 애들 데리고 있는 주부라고 태워주지 않는 그런 택시 말고, 힘없고 약한 사람들만 우선으로 태워주는 그런 멋진 택시회사 차리는 게 꿈이야. 그렇게 모범을 보이다 보면 택시기사를 거칠게 보거나 천시하는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겠어?”
“그러면 택시회사도 직원들 대우를 달리 할 것이고 운전자도 본인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냐”고 한씨는 말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세상은 맘먹기 나름인 것 같아. 남들은 교원 정년이 2년이나 단축됐다고 실망했지만 난 안 그랬어. 2년이나 먼저 하니까 더 ‘젊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잖아. 이제 우리 사회도 이런 긍정적인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오늘도 달리는 택시 운전기사 한유석씨. 그가 신바람 나게 꿈꾸는 ‘택시 속 세상이야기’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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