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은퇴란 없다 본문
은퇴하지 맙시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은퇴총서
내 인생의 오후 / 윤영걸
한국인 기대수명이 80세를 넘어섰다. 늘어난 수명은 가히 신의 축복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다. 너무 빨리 은퇴해야 하는 것도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우리네 일생을 놓고 보면 심각한 불균형이 발견된다.
인생 전반기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없이 보내다가 인생 후반기엔 시간이 남아돌아 고통을 받는다. 한창 일을 할 40대에 명예퇴직으로 직장에서 내쫓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들이 지하철이나 공원에서 시간을 ‘죽이는’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다.
고령화 시대에 40~50대의 중년층이 대거 일터에서 내몰리는 현상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과거에는 정년퇴직을 하고 몇 년을 소일하다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50대는 청년이고, 40대는 사춘기 청소년이며, 30대는 초등학생과 같다. 조기 은퇴는 가정은 물론 국가의 경제적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어깨가 축 처진 채 빈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족들 눈치나 살피며 사는 삶은 너무 불행하다.
바쁘기만 한 청장년층과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방황하는 중노년층 사이에 불균형과 비효율을 해결하는 일이 시급하다.
은퇴하지 않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 몸담던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본인의 의사만 있다면 다른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노력과 인식 전환이 우선이지만 조기 은퇴자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히브리어에는 ‘우연(偶然)’과 ‘은퇴(隱退)’라는 단어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숨쉬고, 일하고, 먹고, 자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은퇴’라는 개념도 없다.
유명한 랍비 다니엘 라핀은 《선한 부자를 위한 돈버는 10계명》이라는 책에서 유대인에게 경제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은퇴를 터부시 해온 데 있다고 말한다. 에덴 동산을 돌보는 일을 맡은 아담에게는 나이 제한이 없었다.
건강과 수명이 허락할 때까지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은퇴는커녕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업무 지식이 풍부해지고 인맥이 넓어지며 역경에 강해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땀을 흘리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우리가 일을 하는 까닭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 자체에 돈버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므로 선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은퇴를 당연하게 여기면 단지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임한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몇 년 후에 은퇴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결과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활동이 위축되고 매년 한 해 한 해를 넘기는 데 급급해진다. 일종의 정신적 악성 바이러스를 몸에 두고 있는 꼴이다.
‘인생 70부터’란 말도 옛날이다. 요즘에는 팔순(八旬)이 넘어서도 쌩쌩하게 사회 각 분야를 주름잡는다. 미국의 ‘가장 힘 있는 80세 이상’ 80명을 선정해온 웹진 <슬레이트>가 2009년에 명단을 공개했다.
미국의 방송·출판업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여성 앵커 바버라 월터스, ‘메모리칩 능력은 약 2년마다 두 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한 고든 무어 인텔 창업자, 미국에서만 1억 부 이상의 책을 판매한 추리소설 작가 메리 히긴스 클라크, 헬리 키시전 전 국무장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이다.
‘인생 백년 사계절’이라는 얘기가 있다.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까지가 ‘겨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70세 노인은 단풍이 아름다운 만추(晩秋)쯤 되는 것이오, 80세 노인은 이제 막 초겨울에 접어든 셈이다.
서양에서는 65세에서 75세까지를 ‘young old’ 또는 ‘active retirement(활동적 은퇴기)’ 라고 부른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아직도 사회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연령이라는 것이다.
호주에서는 100세가 넘는 할머니 투포환 선수가 활약하고 있다. 96세로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타계 직전까지 강연과 집필을 계소했다.
아직도 공부하시냐고 묻는 젊은이에게 “인간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 늙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세계 최고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쉬면 늙는다.”라고 답했다.
또한 바쁜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마음이라며 젊음을 과시했다. 항상 젊은이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바쁘게 사는 것이 젊음과 장수의 비결이다.
일반적으로 직장인들은 인생에서 세 번의 정년을 맞는다. 제1의 정년은 타인이 정년을 결정하는 ‘고용 정년’이고, 제2의 정년은 자신이 정하는 ‘일의 정년’이며, 제3의 정년은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떠나는 ‘인생 정년’이다.
선진국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인생 후반 설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준비를 한다.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한 자산 운용 설계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이 인생 설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년 후 30년 이상의 기간을 돈을 버는 삶을 살 것인지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두 가지를 병행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은행 고위 간부가 자신이 근무하던 은행 점포에 경비원으로 재취업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눈높이를 낮추어 재취업하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남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막일을 하는 ‘점잖은’ 분들도 적지 않다.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체면 때문에 놀고, 일이 힘들어서 놀고···. 한국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노는 사람’이 유독 많다.
노후를 돈으로만 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노후 자금을 모으는 데만 연연하면 가족 간 인정이 메마르고 사회가 각박해진다.
힘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지, 어느 순간 은퇴할 것을 가정해 목돈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노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30대부터 가위눌린 듯 쫓기는 삶을 살면 그건 순전히 자기 손해다. 젊은 시절에 준비해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평생 일할 수 있게 준비하는 자기계발이다.
투기성 재테크에 연연하기보다는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인생을 올바로 살아가는 지혜다. 열심히 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는 법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50세를 전후로 제1의 인생(번식기)의 직업에서 은퇴하고 제2의 인생(번식 후기)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인생 체제(two-lives system)에서는 제1의 인생에서 갖고 있던 직업을 제2의 인생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제2의 인생을 위한 직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개인은 물론이고 급속도로 늙어가는 우리나라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획일적인 노후를 보내는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맞는 후반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뛰는 자세다.
흔히 여행은 목적지가 그 목적지에 가는 과정만 못할 때가 있다. 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흥미진진한 인생이라는 여행을 중도에서 끝내려 하는가. 은퇴를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늘 기대를 갖고 여행을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다. - 존 호머 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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