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1997년 IMF 사태와 한국언론 본문
( 이글은 외환위기 사태가 이나라를 엄습한 1997년 11월 한국의 언론들이 당시 위기를 어떻게 보도했고, 위기를 예고하는 외신보도에 대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보여주는 오홍근 오마이뉴스시민기자의기사이다.
11년이 지난요즘 한국경제를 위기상태라고 경고하는 외신기사가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예전에 그랬듯이' 더 타임스 등 외신들에게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외신이 맞지 않기를 빌면서 11년전과 현재를 비교해 보시라. )
1997년 11월 21일. 결국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말았다. 당시 경제 부총리는 이 사실을 한밤중인 10시 20분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환란煥亂이 터진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이런 지경이 오기까지 한국 언론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국내 일부 언론은 참 태평했다.
먼저 스스로 경제 기사가 강하다고 자랑하는 중앙일보를 보자.
그 해 11월 1일자 사설은 “경제위기감 과장 말자”고 강조한다.
이틀 뒤인 11월 3일 조선일보에는 “경제, 비관할 것 없다” (남덕우 전 부총리)는 칼럼이 실린다.
이미 그 해 10월부터 국내 은행들은 외국 자본의 빚 독촉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한국은행의 지원으로 연명하다시피 했는데도 이런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 외국 언론의 보도였다.
국내 언론들과 정부가 한통속으로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을 때 불룸버그 통신은 11월 5일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금융 위기는 태국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자금을 요청할지도 모른다”고 타전했다.
이 기사는 이튿날인 6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지에 1면 톱으로 실렸다.
당시 외환위기 가능성을 전세계에 타전하고 한국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았던 블룸버그 통신 빌 오스틴 기자는 일본에 홀로 상주하며 이웃 나라인 한국까지 맡아 취재를 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11월 7일 조선일보는 은행이 수입업자를 대신해 대금지급을 약속하는 수출신용장(LC) 내도액이 석 달째 증가함으로써 97년 하반기에 무역수지가 흑자로 반전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사를 실었다.
이튿날인 8일 중앙일보는 “외국 언론 한국 금융상황 왜곡 보도”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국내 사정에 어두운 외국 언론들이 시장에 돌고 있는 소문에 의해 한국의 경제 상황을 왜곡 보도하고 있다.
계속 부정확한 추측 보도를 일삼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재정경제원의 방침을 소개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도 국제 금융시장에 한국 경제를 의도적으로 흔들기 위한 악성 루머를 특정 세력이 유포했을 가능성과 외국 언론들이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발표와는 다를 것으로 보도한 것도 뭔가 음모가 있는 루머의 연장선”이라는 재정경제원 관계자의 주장을 인용해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10일자 “외국의 ‘한국경제 때리기’ ”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와국 언론이 근거도 없이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다거나 외채통계를 함부로 인용하는 것은 언론 자유의 차원을 넘는 것”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명과 대응책을 촉구한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外信들 한국 경제 흔들기”란 사설은 한술 더 떠 “주가폭락과 환율급등을 초래한 이 같은 외신보도에 정부는 반박문 게재 요청과 같은 대응책만으론 미흡하며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손해배상청구까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경제의 실상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정부의 변명에 맞장구를 치며 ‘개그 콘테스트’를 연출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 경제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위기 불감증은 그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11월 15일 “한국경제 어디로 가나(국내외 분석-전망)”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재계와 정부의 상황 인식 차이를 전했다.
“기업은 하루하루가 전쟁인데도 정부는 거시지표만 보고 있다”며 금융실명제 유보 등 특단의 경제 회생 조치를 요구하는 재계의 주장에 맞서 “경상적자가 줄고 기업 설립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 기초)은 튼튼한데 웬 호들갑이냐”는 반응을 보인 정부의 입장을 나란히 게재했다.
그러면서도 기사 윗부분에 큰 제목으로 “ 위기 너무 과장’ 낙관론 우세”라는 우산을 씌움으로써 시시각각 위기상황으로 치닫는 현실을 외면했다. 다시 그로부터 나흘 뒤인 11월 19일 조선일보는 갑자기 ‘금융 위기의 현장’이라는 큰 제목에 “국정리더십 회복 파국 막아야 할 때”라는 부제를 붙였다.
은행들이 달러를 구하느라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매일 해외 외환시장을 찾아 SOS를 치고 금융기관의 도산 위기가 현실로 닥쳤다고 적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벌써 IMF와 구제금융에 대한 협의가 진행 중이었으며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임박한 시점에 가서야 비로소 한국 신문은 위기라고 대서특필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국내 신문만 열심히 보면서 그 기사를 믿었던 이 땅의 보통사람들은 11월 21일 한밤중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김영삼 정부의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발표를 듣게 된다.
<2004년 1월 펴낸 오홍근 칼럼집 '칼의힘 펜의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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