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속
바둑황제 조훈현 본문
세계 바둑계를 배경으로 삼국지를 쓴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한.중.일 동양 삼국이 바둑의 중심국이기에 구성요소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삼국의 비중도 결코 어느 한 나라에 기울지않고 팽팽한 황금분할을 이루고있어 균형적이다.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자 엄청난 바둑인구를 지니고있는 종주국(宗主國)이고, 일본은 바둑을 예(藝)와 도(道)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중흥국(中興國)이며, 한국은 앞서 거론한 두 나라들과의 진검승부에서 승승장구를 거둔 강대국(强大國)이다.
삼국의 바둑영웅들이 펼친 극적 드라마를 소재로 삼국지를 구성한다면 세계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한 한국의 기사(棋士)들이 단연 주인공에 캐스팅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 주연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조훈현을 택하겠다.
현대바둑 초창기에 바람을 일으킨 천재 오청원은 바둑 삼국지를 태동시킨 공로자로 족하고, 면돗날 사카다 역시 삼국을 아우르기에는 놀았던 무대가 좁았으므로 큰 역할을 주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기단을 주름잡았던 조치훈 역시 세계기전에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으므로 일국의 맹주로 매김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기라성같은 영웅호걸들이 즐비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조훈현의 기록과 업적을 능가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한 사람, 세계 랭킹 1위 이창호가 기록상으로 조훈현을 앞서지만 그의 존재는 조훈현을 더욱 빛나게 하는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형으로써 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조훈현의 위대성은 침체되어 있던 한국바둑계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그리고 이창호를 제자로 키워 바둑천재의 계보를 이었다는 점, 이 두 가지만으로로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조훈현의 이름 석 자 앞에 무수한 찬사와 수식어가 붙어 왔지만 ‘바둑황제’라는 말 이상 적합한 어휘는 없다.
세계최연소 9세 입단에서부터 최고령 타이틀 보유기록에 근접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국내 전관왕 및 국제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비롯해 무려 150여 회의 타이틀 획득기록과 세계 최다승 기사로 자리매김된 찬란한 업적.
청출어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이창호의 배출.
조훈현의 삶은 경이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승부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경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 하네다 공항을 떠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만의 하산(下山), 타의에 의한 어정쩡한 귀국이었다.
제자의 일본 체류연장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던 스승 세고에도 묘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떠나가는 제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일본바둑계의 거목 세고에 선생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훈현이 떠나간 지 4개월 동안 니시오카의 자택에 칩거하다 마침내 자결(自決)이라는 수단을 택해 세상과의 연(緣)을 단절하고 말았다.
그의 자결은 일본 바둑계에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세고에는 왜 자결했을까?
소문에 의하면 오랜 벗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애제자의 대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거란 설이 나돌았다.
어쨌든 세고에는 바둑계에 찾아보기 드문 진정한 큰 스승이었다.
수제자 오청원을 키워놓고 그에게 자신의 집을 물려준 뒤, 자신은 셋방을 얻어 나간 담백한 성품의 세고에.
그가 남긴 2통의 유서를 보자.
[1] 가족들에게
0000: "노구(老軀)로서 더 이상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저 한다."
[2] 친구, 후배들에게
000 :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
첫번째 글은 떠나는 변(辯)이요, 두번째 글은 염원과 당부인데 그가 얼마나 조훈현을 아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세고에의 주변인들은 유서의 당부를 들어주지 못했다. 조훈현을 다시 일본으로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그렇지만 선생의 염원은 풀렸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훈현은 척박한 한국의 바둑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우람한 거목으로 대성했으므로.
조 국수의 에세이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세고에 선생의 죽음을 뒤따라 애견 뱅케이도 비실비실 앓다가 죽었다.
위 아래로 소년기의 조훈현을 지탱해주었던 기둥들이 일시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세고에와 뱅케이에게는 조훈현이 거의 절대적인 희망이자 낙(樂)이며, 존재의 이유였던 게 아니었을까?
스승과 애견은 조훈현에게 사사로운 그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알아서 정(情)을 뗀 게 아니었을까?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의 하산 주변에는 이처럼 드라마틱한 전설이 깔려 있었다.
현대 한국 바둑의 정상은 거의 호남출신 기사들이 독무대나 다름없다.
조남철(부안) - 김인(강진) - 조훈현(영암) - 이창호(전주)-이세돌(신안)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라인업을 보라. 거기에 조남철의 사촌 아들인 조치훈도 알고 보면 부안출신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현상에서도 풍수지리적 코드를 대입해보고 싶다.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풍요로운 호남 땅은 예(藝)와 풍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려시대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사람들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현실 바깥쪽으로 많이 분출됐으리라.
서편제와 육자배기, 문인화와 도예, 그리고 바둑 같은 취미가 성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내력들이 흐르고 맴돌고 고여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오늘날 바둑이란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은 아닐까?
억지라고 몰아붙이면 할말 없지만 어쨌거나 세대별로 정상의 자리를 대물림해 온 호남출신 기사들의 득세는 전체 프로기사 출신지별 분포 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나서 한번쯤 이런 식으로라도 분석을 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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